충무로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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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6-11-1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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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역 5번 출구를 빠져나오면, 거기서부터가 내겐 충무로다. 행정구역상 어디부터가 충무로인지 어디까지가 충무로인지는 모르지만 내게는 여기서부터가 '내가 가고싶은' 충무로다. 오른쪽으로 차례로 열리는 골목 입구 중 항상 약국과 이동통신 대리점 사이의 골목에서 우회전한다. 그 골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더 정확히는, 내가 걷고 돌아오는 '코스'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조금 걸으면 오른쪽에 [포토랜드]가 나온다, 그 맞은편의 [대진월드]의 쇼윈도를 기웃거리는 일이 충무로가 주는 즐거움의 시작이다. 이 집은 중고거래가 활발하지 못한지 쇼윈도 너머의 사진기며 렌즈가 오랫동안 바뀌지 않는 편이다. 팔리지 않는 중형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기분은 즐겁고 아릿하다. 더이상 팔리지 않는 물건들은 더이상 팔리지 않는 시대, 더이상 선택되지 않는 시대의 상징이다. 그것들이 그 자리에 남아있어줘서 나는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내 눈앞에서 사라지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의 한 부분이 남아 있어주는 것이다. [대진월드]에서는 뭔가를 사본 적이 없다. 아! 포그(FOGG) 가방들을 사고 싶어한 적은 많다.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아 마음에 드는 색의 캔버스천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크기의 가방. 하지만 너무 비싸다. 그래서 번번히 고개를 갸웃거리다 돌아선다.

그 다음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일출포토]가 있다. 깨끗하고 상태 좋은 사진기들이 진열되어 있어서 이곳 앞에선 꽤 한참 서있는다. 가끔 정말 마음에 드는 사진기가 있으면 여기선 선뜻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여직원이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나 친절하고, 비교적 정직하게 내가 묻는 이런저런 사소한 질문에 답해준다. 물어만 보고 사지 않고 나와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게 해주는 타입이다. 그래서 소심한 A형의 남자를 가게 안쪽까지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물론, 이곳의 중고사진기며 렌즈들은 가격이 조금 비싸다. 늘 구경만 하고 나온 게 못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지난 겨울에 나는 이 가게에서 니콘 D70을 신품으로 샀다. 내 단골가게에서 부른 가격보다 2만원 더 주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 다음 사거리에선 직진이다. 그러면 내 단골 현상소인 [월포]가 있다. 내가 [월포]를 이용하는 건, 이 현상소가 특별히 현상을 잘해서도, 특별히 가격이 싸서도 아니다. 친절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친절한 건지, 하필 내게 친절한 건지는 모르지만, 이곳의 직원들은 편하고 친절하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예전에 카운터를 보던 긴 생머리의 아가씨는, 그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 하루를 기분좋아지게 해주었다. 월포에 필름을 맡기고, 맡겼던 필름을 찾아 라이트 박스에 올려놓고, 즐겁게 한 컷 한 컷 바라보는 것만으로 십오분쯤은 훌쩍 지난다. 그리고나선 안쪽 벽에 진열된 가방들을 구경한다. 언제나 같은 가방들이지만 구경할 때마다 그 날의 기분만큼 새롭게 즐겁다.

월포를 나오면 나온 방향으로 똑바로 걸어 [줌카메라]에 간다. 이곳은 충무로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친절하게 손님을 맞는다. 가격도 아주 좋다. 구경하기엔 길에 면한 쇼윈도가 너무 작아서 1분 정도면 다 구경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몇 발짝 더 걸으면 중부경찰서로 이어지는 조금 넓은 차도에 닿는다. 이 길 양쪽으론 유서 깊은 카메라샵들이 늘어서 있다. 일단 길을 건너 [XX카메라]부터 구경한다. 쇼윈도가 가장 넓은 가게라서 구경하기엔 그만이다. 친절하게, 메이커별로 구획을 정해 사진기들을 진열해놓은 것도 고맙다. 라이카 바디와 렌즈들도 굉장히 많이 갖추어놓았기 때문에 구경의 즐거움이 배가되지만, 유감스럽게도 가격은 비싼 편이다. 장사하는 아저씨가 두 분인데 썩 정직하다는 느낌은 안들어서 기껏 물건을 산다고 해봐야 악세사리 정도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그 옆 [21세기]와 [인포카메라]의 별 볼 것 없는 쇼윈도를 힐끔힐끔 쳐다본 후 길을 다시 건너 [충무양행]과 [XX카메라]의 진열품들을 구경한다. [XX카메라]에도 적지 않은 라이카들이 있지만 상태가 좋은 기기가 별로 없을 때가 많아 썩 흥미가 나지는 않는다. 여기서 길을 따라 똑바로 더 걸으면 그 유명한(?) [XX카메라]와 [XX카메라]가 나오지만 보통은 들르지 않는다. [XX카메라]는 친절하다. 하지만 라이카를 살 수 있거나 언제라도 살 마음의 여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다. 라이카를 구입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게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뭐랄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위화감이 [XX카메라]의 입구를 경계로 감도는 느낌. 엉뚱한 비유일 수 있겠지만 '자본주의식 친절함'이랄까. 마치, 수입차를 구입할 여력이 있는 사람과 그저 동경할 뿐인 사람이 수입차 매장 딜러의 버터 바른 친절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의 차이같은. 다음, [XX카메라]는 그 앞을 지나치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19세기 후반의 가격이 아직 살아 숨쉬는 곳.
그래서 오른쪽으로 다시 방향을 바꾸어 [월드카메라]와 [세기상사]를 찾는다. [세기상사]에서는 한 달에 한 번 7만원어치씩 필름을 산다. 회사에서 한 달에 7만원씩 문화비가 나오기 때문. 영수증을 첨부해 쓴 금액을 돌려받기 때문에, 예를 들어 7만 3천원어치 필름을 샀다면, "저, 7만원은 카드로 해주시구요, 3천원은 현금으로 드릴께요" 말한다.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여러 가지 종류의 필름들을 조금씩 섞어 산다. E100VS 4통, 벨비아 2통, NPH 400 2통, 일포드 델타 100 2통, 프로비아 400 1통, TMAX 400 1통 정도가 보통 한 번의 쇼핑 목록이다. 계산을 치르고 문을 나설 땐 기분이 세 배쯤 좋아진다. 필름과 영수증을 담은 비닐봉투에서 뽀각뽀각 소리가 나면 그 소리가 더 커지게 경쾌하게 팔을 휘두르며 [월드카메라] 앞으로 간다. 별로 구경할 건 없는 쇼윈도. 하지만 이 가게의 아저씨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라서 좋다. 흥정을 하는 순간에도 냉냉하지 않은, 깎아주지 않아도 왠지 밉지 않은. 그래서 매번 같은 사진기의 값을 묻는다. 언제나 RTS III. 지난번에 110만원까지 흥정해놓은 뒤론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다. "저 앞쪽 RTS III 얼마까지 주실 수 있으세요?" "아 지난번에 110만원이라고 했잖아요" "에이, 전 또 그 사이 좀 더 시세가 내려갔나 했죠~" 매번 똑같은 대화지만 즐겁다. 사진 찍는 맛, 사진기 사는 맛 못지 않은 즐거움... 사람이 주는, 사람의 목소리가 주는 즐거움일까, 필름통이 달각거리는 소리에서 폴폴 올라오는 즐거움에 그 '사람의 즐거움'이 더해진다. 아아- 오늘도 충무로에 오기 잘했다....
조금 걸어 다시 골목사거리. [강산카메라]의 쇼윈도엔 니콘의 옛 기종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니콘 F나 F2같은 왕년의 명기들이 세월을 과시하며 빛난다. '필요' 없어도 가지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물건들. 사장님의 눈과 내 눈이 유리창을 격하고 마주치면 사장님의 눈은 꼭 "좀 더 늙은 후에 오라구, 풋내기 양반~" 하는 것 같다. 기분 나쁘지 않은 위화감. 나는 좀 더 나이들어야 하는지 모른다. 좀 더 온전한 한 사람의 어른이 되고 싶다면...
이 사거리에서 카메라샵 순례는 끝난다. 오래 걷지 못하는 내 오른발로 더 이상의 코스는 무리다. 이쯤에서 쉬어야 한다. 여기서 선택은 3가지인데, 아주 배고플 때는 명보극장쪽으로 걸어 극장 1층의 맥도널드에서 찬 우유 한 잔과 반으로 커팅한 버거를 먹는다. 조금 배고플 때는 반대방향으로 조금 걸어 샌드위치와 음료를 싸게 파는 깨끗한 가게로 간다. 상호가.... 기억나지 않는다. 흠. 이 집은 벌써 몇 번 이름이 바뀌었다. 이 두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는 명보극장쪽으로 이어지는 골목 3분의 1쯤에 있는 [53-22]로 간다. 일리(ILLY)의 원두로 진한 에스프레소를 우려주는 카페다. 주인아저씨가 얼마전 가게를 후배에게 넘긴 후 조금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지만 커피맛은 아직 그대로다. 전주인 아저씨가 눈을 부릅뜨고 품질관리(?)를 하고 있다나^^ 의자가 조금 낮아 불편하긴 하지만 그 불편함을 빼놓고 다른 모든 것이 편한 공간이다. 모던재즈나 파퓰러한 클래식곡이 떠도는 공기가 편하고, 수줍고 장사가 익숙해보이지 않는 새주인아저씨의 표정이 편하고, 손님이 많지 않은 아마츄어적인 카페의 분위기가 편하다. 커피맛은 최상급. 항상 위염을 달고 사는 나로서도 주문하지 않을 수 없는 퀄리티의 커피다. 이 집의 블렌드 말고 4분의 1로 희석한 라이트 커피가 있지만 나는 라이트 커피를 또다시 묽게 해 내달라고 주문한다. 그것만으로도 항상 출혈 상태인 내 위와 십이지장엔 무리가 되지만, 그래도 어쩌랴 마시지 않을 수 없는 이 진짜 커피의 유혹 앞에서라면.
읽을거리가 없을 때엔 [월포] 옆의 서점에서 책을 한 권 사들고 가기도 한다.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신간이 주로 간택(?)되는데, 소설적 재미보다는 글쓴이의 감수성이 내 그것과 비슷한 종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에쿠니의 문장들을 한 줄 한 줄 따라가다 보면 빠른 속도로 마시지 못해 식어버린 커피가 잔의 절반쯤 남는다. 그때가 일어날 시간이다. 필름냄새와 커피향과, 새 책의 활자에서 나오는 잉크냄새가 섞여 비현실적인 현기증을 일으킬 즈음이다. 딱 좋은 기분. 딱 좋은 쓸쓸함. 나를 존엄하게 하는 쓸쓸함... 이 기분에서 일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나이의 어른이, 그 어른의 삶이 쯔쯔 혀를 차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딱하기도 하지- 하는 표정이라서, 참 밉다.

충무로역쪽으로 되돌아가는 길은 이상하게 너무 춥거나 너무 덥다. 한 곳의 가게도 들르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최단거리를 걸어, 지하도를 건너 반대쪽 큰길가에서 택시를 탄다. 돌아올 땐 지하철을 타지 않는다.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려서다. 택시 뒷자석에 몸을 묻고, "약수역쪽이요" 말하고, 눈을 감고, 필름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몸쪽으로 꼬옥 끌어당긴다. 좀 있으면 회사에 닿는다. 일과 조직과 상하관계와 어른인 척 하는 남자애 여자애들이 거기 있다.
늘 같은 길을 걸어 같은 곳으로 돌아온다. 충무로의 수많은 골목들 중 내 코스에 들어있는 지번들만이 내 충무로다. 수많은 삶의 방식 중 내가 선택한 것, 내가 체화한 것만이 내 삶의 방식인 것처럼.
오늘도 충무로에 다녀왔다. 오늘도 나는 이런 현카피다.
댓글목록
라동균님의 댓글

이야기를 따라 즐거운 기억들을 떠오르는 시간이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재덕님의 댓글

원래 제 홈페이지에 올릴 사적인 글이었기 때문에 상호들이 그대로 나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썩 안좋게 인상을 묘사한 샵 부분은 문제가 될 것 같아 상호를 지워놓습니다. 물론 안좋은 평이라고 해봐야 어디까지나 제 개인의 느낌에 국한되는 것일 뿐, 제게 좋은 느낌의 샵이 다른 분껜 안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 것이고, 그 반대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냥, 저 사람에게는 그랬구나- 정도로 읽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기훈님의 댓글

현카피님, wingwing입니다. 여기서 뵈니 또다른 반가움이....^^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즐거움을 충무로에서 보내시는 듯 하지만 돌아보는 길이
비슷한 것 같아 더더욱 반갑네요.
요새는 퇴근길에 필름 맡기고 찾느라 월포까지만 가게되는데 현카피님 way로 언제 함 투어라도 해봐야겠네요. 또, 혼자 찻집에 들어가는 일이 낯익지가 않아서 아직은 53-22에는 아직 못 가봤지만 꼭 한 번 들러봐야겠어요...^^
정무용님의 댓글

현재덕님의 포토 엣세이는 잔잔한 감흥을 줍니다.
심재명님의 댓글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커피점.. 저도 한번 가보고 싶네요.
이재정님의 댓글

저도 그 현상소 애용하는 곳이죠. 같은 이유입니다. 접수 보는 분의 친절함에...제가 아는 분은 긴 머리는 아니었던것 같긴 하지만. 고 옆에 x카메라 남자 직원도 드물 정도로 친절하죠.
그런데 맨 아래 사진의 현상소는 음.....씁쓸했던 기억이.
얼마전 암실용품 사러 그곳 2층에 들렸는데 인터넷에 나와있던 도란社 밧뜨와 여러 용품 물어보니 여직원이 도통 모르더라구요...들어 갈때부터 아는척 안하기에 내가 먼저 인사 할때부터 알아 봤어야 하는데-,.-
지원? 나온 남직원은 심드렁하게 없다고나 하고...
에잉, 갈수록 현상인화용품 풍부히 갖춰 놓고 맘에 드는거 한번에 사기 힘들어 지네요.
반x카..에서 간만에 맘에 드는 인화지 사 즐거웠던 기억도 있네요^^.
예전에는 모터싸이클 좋아해 퇴계로 뻔질나게 나갔는데 이젠 사진 때문에 충무로로 나가네요....
참,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어찌하다 보니 내 넋두리만..
조효제님의 댓글

무심코 지난 친 충무로... 벌써 십 수년이 지났네요.
이런 충무로를 이런 시각을 가지고도 글을 쓸 수도 있군요.
글을 읽고 있으면서 그동안 생기고 없어진 카메라 샵들이 생각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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