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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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박대원
- 작성일 : 06-05-09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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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무겁다. 그래서 나는 고백한다.
지난 토요일 오후,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충무로로 나섰다.
봄비가 질척거리고 있었다.
커피숍에는 전진석씨가 먼저 나와 있었다. 친구들이 다 나올 때까지는 아직 사오십 분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커피숍을 나섰다. 바로 근처에 있는 <보다 봄>에 잠깐 들러보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길가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길 건너 건물,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는 창가에 한 남자가 걸터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나는 무슨 작업을 하는 중인가 보다 생각했다.
검은 연기가 점점 더 거세지는가 싶더니 아예 시뻘건 불길이 보였다.
불이야! 불이야! 누군가 다급하게 외쳤다.
길가의 사람들이 허둥대기 시작했고 나는 셔터를 눌러댔다.
앗! 나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가 뛰어내린 것이다.
오~! 하느님!
차라리 눈이라도 질끈 감아버릴걸!
경찰차가 이미 의식을 잃은 그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그리고 소방차가 몰려 왔다.
불길은 이내 잡혔다.
나는 커피숍으로 되돌아왔다.
좀 찍었소? 인사말처럼 전진석씨한테 물었다.
찍긴요. 남의 집 불난 것 어떻게 찍겠어요?
그의 대답이 충격과 흥분으로 아직도 뜨거운 내 이마를 철석 쳤다.
아차차! 그제서야 나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이윽고 친구들이 하나 둘 나타났고 자리는 곧바로 왁자지껄 떠들썩해졌다.
그날 나는 친구들과 함께 회식을 하지 못하고 혼자 길거리를 걸었다.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질척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그리고…… 지금도……싫다.
-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댓글목록
정승진님의 댓글

충무로 사랑방 가셨다가 못볼걸 보시고....
충격이 크셨겠어요.
얼렁 잊으세요.
김병인님의 댓글

박선생님...
그날 말수가 적으셨는데 그런 일이 있으셨네요.
기자나 저널리스트가 아닌 이상 박선생님처럼 고뇌할 밖에 없을 듯 합니다.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제가 들고 있는 사진기가 싫어질때가 있읍니다.
물론 선생님처럼 가슴을 찔린 듯한 상처정도는 아니었습니다만...
그래서 저는 아직도 사람을 못 찍나 봅니다.
같이 근무하고 있는 후배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찍힌 사람도 찍히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아직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진찍으러 다른 나라로 도망가는지도 모릅니다.
언제 술한잔 사주세요.
제가 먼저 조를지도 모릅니다.
박장필님의 댓글

사람에 따라 대처 방법이 달랐을 거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 박선생님은 그 상황에서 하실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혹시 전에 그런 경험이 있거나, 떨어지신 분을 응급처치할 능력이 있었다면 다른 행동을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의료계통에 있고(의사는 아닙니다), 전에 경험도 있지만, 당장 저 상황에서 떨어지신 분 선뜻 못 도와드립니다. 척추부상을 확인할 능력이 안되므로...
또 제 입장에선 누가 섣불리 도와주려는 것도 말렸을 겁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가 더 훌륭하십니다.
하효명님의 댓글

조문영님 생각에 한 표.
고백 후 훌훌 털어버리세요.
이번 일로 취미 사진 생활에 영향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박대원님의 댓글

제발 그가 살아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 중부경찰서, 소방서, 건물관리실 등을 찾아 다시 수소문했습니다.
참으로 불행하게도, 그는 역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올해 나이 50세.
몇 년 전 부인과 이혼한 그는 건물 5층 구석을 거처 삼아 기거하면서 건물관리 일을 해 왔답니다.
놀랍게도, 그는 9층짜리 그 건물 주인의 친동생이었다 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임규형님의 댓글

가슴아픈 일을 보셨군요.
불행한 일을 기록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린시절, 반공 교육 때문에 교실 뒤 게시판에 한국전쟁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과 환경미화라고 붙여 놓은 이쁜 사진들이 사진의 두가지 힘을 겪게 해주었습니다. 미적 감동과 고발적 성격... 오늘 위의 사진을 보며 사진이 주는 충격과 그 뒤에 있는 작가의 고백 사이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충격이 빨리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freeoj김영재님의 댓글

많은 생각이 들게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그분.. 창가에서 좀더 기다려 주셨다면 좋았을터인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선생님께도 위로를 드립니다.
벌써.. 여기저기 수소문하신 노력에 마음이 숙연합니다.
또한 작가로서의 선량한 양심이 후배들에게 배움이 됩니다.
얼른 마음 회복하시어 편안하고 익숙한 삶에 가까운 사진들 계속 보게 해 주시길..
최우석님의 댓글

박선생님의 설명과 사진이 말해주는 당시 상황에 의하면, 화재현장 길가에는 이미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4층의 창문틀에 몸을 절반정도 내놓은 피난자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위 상황에서 소위 위난대처를 훈련받은 자 (이 경우에는 소방관) 만이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효과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단정하고 수수방관할 것은 아니겠지만, 군중들이 아무런 장비없이 화재가 발생한 빌딩 4층으로 올라가서 구출해 나올 수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길거리 군중들이 피난자에게 뛰어 내리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더라도 피난자는 뛰어 내렸을지 모릅니다. 피난자가 4층 높이에서 뛰어 내리더라도 충격을 덜 받도록 군중들이 스크럼을 짜서 받아 주기라도 했어야 했을까요? 순간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군중들이 잘 훈련된 조직처럼 스크럼을 짜서 요령있게 받아 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뛰어 내리는 요령을 즉석에서 알려 주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뛰어 내리는 요령을 가르쳐 주면 피난자가 그대로 할 수 있었을까요? 결국 당시 거리에 있던 사람들로서는 피난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피난자가 추락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결과를 안타까워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누군가 망자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으로 남겨 주는 역할이라도 하는 것이 절실한 행위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록이 어떠한 용도로 쓰이게 될지까지는 생각하지 무방할 것입니다. 사회고발의 의미가 있는 경우라면 인터넷에 올려 회자시키는 것이 용인될 수도 있을 것이고, 망자의 의식있는 마지막 순간을 보지 못한 유족들로서는 위 사진을 보고 슬픔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책임소재를 밝히는 증거로서 유용하게 사용되는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功利主義的인 생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으나, 저도 humanism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쩌노' 하는 탄식만 하며 두손 놓고 있는 것 보다는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사고를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치환님의 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차후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위기를 직감하고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군요.
대원님 덕분에 생각하는 바가 많습니다.
이인한님의 댓글

이런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지만, 선배님 마음과 고백의 글이 참 아름답습니다.
글을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김봉섭님의 댓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박선배님의 고우신 마음에 저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듬고 다시한번 두손을 모으게 됩니다.
선배님!!! 힘내십시요!!! 이번주 토요일 모든것 잊고 함께 가시죠~~~
박유영님의 댓글

박대원선생님, 상심마십시오.
선생님의 아름다운 마음, 소박한 고백이
라이카클럽 회원님들 가슴에
잔잔한 성찰의 파문이 되었습니다.
힘내십시오. 아자!아자!
심재명님의 댓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그리고 좋은 글들 잘 읽었습니다.
박선생님께서 회의가 드시고 마음이 쓰이시는 이유가, 타인에게 일어난 불행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익이라고 하는 말이 이상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것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것이 사진을 통해 추구하는 예술적 표현이건 아니건) 이익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박선생님께서 아무리 좋은 동기를 가지고 계셨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때 5층에 앉아있던 사람이 박선생님을 발견하고, 혹은 그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이 주위에 있어 박선생님께서 사진 찍는 것을 보고 박선생님께 욕을 하거나 화를 냈다고 한다면, 아무도 그 가족이나 친척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박선생님조차 말입니다.
이렇게 박선생님께서 하신 일이 "객관적으로" 적합하다고 할 수 없는 점이 박선생님께서 걱정하시는거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많이 접하는 street photography에도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리촬영을 하시는 분들이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결국은 무작위의 타인을 (대부분 그들 모르게)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사진이 중요한 사회적가치가 있다거나, 혹은 피사체의 정체를 완전히 노출시키지 않거나.. 혹은 피사체의 본질/아름다움을 아주 잘 나타냈다거나 했을 때, 사진행위를 좀 더 합리화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찍는 사진이 것이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면, 사회적인 규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박대원님의 댓글

그 전후 심경
그날 밤
높은 빌딩 옥상의 난간, 그 위에 내가 서 있다. 한 순간 나는 미끄러져 추락한다.
아아아아앗! 비명과 함께 쿵!
아내 말로는 내가 자다가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면 벌떡 일어나 방벽을 이마로 찧더란다. 꿈 속에서 추락을 피하려고 몸부림쳤나 보다. 한 30년 전의 얘기다.
그 추락하는 순간의 공포! 어찌나 생생했던지 지금도 나는 잊지 못 하고 가끔 몸을 떨곤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이건 분명 아니다!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 그곳으로 갔다. 접근금지의 노란 테입이 둘러 쳐있고 한 노인이 깨어진 유리조각을 치우고 있었다.
"글씨...... 아직 모른다는디 어디 살 수 있겠수, 5층에서 떨어졌는디."
나는 더 묻지 못하고 뒤돌아섰다.
그날 밤 내내 괴로웠다.
왜 찍었나?
왜 찍기만 했나?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어서?
다른 사람들이 찍어서?
참 어처구니 없다.
불은 그렇다 치고 사람을 먼저 구했어야지......
왜 5층으로 뛰어 올라 가 볼 생각을 못 했나?
내가 그렇게 비정하고 비겁한 인간이었던가?
이 생각 저 생각 자괴심이 끝이 없었다.
다음날
문득 잠에서 깨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서둘러 충무로로 나갔다. 일요일이라 한적했다. 내 발걸음은 자연 그 현장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죽었다고 하던데요,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확실치는 않았다.
"사람이 왜 없었냐고요? 주차빌딩이니까 그렇죠."
어쩐지 이상했었다. 그 큰 건물 안에. 아무리 토요일 휴무라 할지라도, 사람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었으니까.
"차 빼러 올라갔던 게 아니라 그곳에서 먹고 자고 했었죠.
근데 참 이해가 안되는 것이 그만한 불에, 출입구도 잘 알겠다, 왜 도망쳐 나오지 않았는지......
혼자 불끄려다 연기때문에 때 놓친 게 아닌가도 싶고...... 사장이 엄하고 무섭거든요."
나는 관리실에서 나와 연기에 그을린 5층을 올려다 보았다.
그가 뛰어내리던 순간, 불붙은 옷자락의 모습, 너무도 생생하다.
그는 1, 2층 사이 벽에 설치된 발코니형 철판 빛가리개 위에서 한번 충격을 받고 바닥으로 떨어졌었다.
그 추락순간만은 차마 못 찍었었다.
그렇다고 어디 자위가 될까!
세쨋날
오늘은 어버이 날.
또 충무로행이다.
필름을 그냥 버려버릴까 하다가 현상을 맡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맘 속으로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괴로움은 가시지 않았다.
저녁, 큰애 집에 가족이 모였다. 어버이 날 축하 케익에 촛불을 켜놓고 손주가 '생일축하'노래를 불러도 내 마음은 캄캄했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나는 마음먹었다.
고백하자!
이제는
두 번 다시 저질러선 안 될 잘못이었다.
해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이 먼저다. 생명이 먼저요, 그 존엄성이 먼저다.
그 이떤 이유에서도 이것들은 지레 포기될 수 없다.
사진은 단지 그 다음일 뿐이다.
하지만 이게 다일지 영 자신이 없다.
그날 이미 추락한 뒤일망정 그 순간 뛰어가 그이의 손이라도 한번 잡아주었었다면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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