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흥소설] 버쓰이어 (Birth-year)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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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6-04-0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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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2의 지금 주인은 사진가가 아니다. 사진가인 전 주인의 후배다. 그렇게 몇 번이나 얘기해줬는데도 양지는 잊어버렸나 보다.
"사장님한테 M4 시리얼에 대해서 묻더라는 거죠?"
"네, 몇 번부터 몇 번까지가 69년에 만들어진 거냐고.... 제가 잘 모른다고, 딱 몇 번부터 몇 번 이렇게 나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해당 안되는 시리얼도 있고, 하여튼 자세한 건 정리해놓은 표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라고.... 말해 드렸지요"
"......."
"혹시....."
"네?"
"이런 말씀 주제넘지만.... 혹시 여자친구분 부모님 중 많이 편찮으신 분이 계신가요?"
"아니.... 아, 네.... 어머님이 지병으로 당뇨가 있으신데....."
"지난 번 오셨을 때 누군과와 통화하면서 삼십분 넘게 우셨어요. 언뜻 들으니 어머니인가 하여간 병세가 나빠졌다나 합병증이라나 해서 조만간 큰 수술을 해야할 것 같다고...."
"......"
"아휴, 죄송합니다. 제가 낄 데 안낄 데 못가리고 이거 참...."
주인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표정으로 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을 챙겨 카운터 안쪽으로 황급히 들어가버렸다.
종범의 머리 속에 이틀전 자신 앞에서 정중하고 차갑던 양지 어머니의 모습과, 시리얼 맞는 M4를 찾아 잘 알지도 못하는 충무로 샵들을 전전했을 양지의 모습과, 수백 만원 짜리 L렌즈들을 한 번에 몇 개씩 척척 사들이는 성호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종범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무것도.... 떨쳐지지 않을 것을 사실은 그도 알았다.
"형,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성호는 정말 의외라는 듯한, 그리고 정말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종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희요.... 형한테 보란 듯이 잘 살 겁니다. 형도, 그렇게 되길 바라죠?"
"어 뭘 그런 소릴 하냐 기쁜 결혼식날. 오늘은 니가 주인공이다. 니 날이다. 나야 너 축하해주러 온 손님이구"
성호와 말을 놓은 건, 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부터였다. 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남과 말을 잘 놓지 못하는 종범이 성호에게는 쉽게 호칭의 벽을 넘어섰다.
"어? 사진도 찍어주시려나 봐요? 와~ 기분 정말 좋아지는데요. 동호회 최고의 웨딩전문가에게 사진을 찍히다니~"
성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종범은 그저 빙긋 웃어주고 눈인사를 한 후 입구를 넘었다. 등 뒤로 성호의 표정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등 뒤가 축축해지더니 뜨뜻해지더니 그리곤 서늘해졌다.
사진동호회의 두 회원이 결혼하는 자리답게, 식장 곳곳엔 카메라들이 넘쳐났다. 요즘이야 어느 결혼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덩치 큰 SLR 디카들 사이에 군데군데 작은 M바디나 포익틀랜더 R바디를 목에 건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렇지만 그 RF들도 M6, M7, R2A나, 혹은 MP였지, 종범처럼 노출계도 안달린 M4를 들고 온 사람은 없었다. 종범도 결혼식장에 노출계 안달린 RF 카메라를 들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기야 성당의 높은 천장은 SLR 카메라들의 플래시로 바운스 조광할 수도 없었고, 어지간한 망원렌즈로 프레이밍하기에도 너무 깊고 넓었다. 종범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이 앉은 가장자리 벽을 따라 조용히 걸어 앞쪽으로 나갔다. 어차피 다른 사진사들이 많으니 굳이 신랑신부 바로 옆까지 다가가 찍을 필요는 없었다. 의자들 가장 앞 열까지만 다가서면 된다. 그래서 종범은 90mm 엘마리트 렌즈를 가지고 온 것이다. 씬 버전의 구형 렌즈는 중고가격이 싸면서 크기도 작고 가벼워서 오늘의 용도에 딱 맞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 쓰고 팔려고 구입한 렌즈였지만, 종범은 왼손으로 소중히 렌즈를 감싸 잡고 또박또박 걸음을 떼어 놓았다. 노출값 같은 건 양발을 번갈아 움직이는 리듬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었다.
식은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있었다. 신랑 신부의 머리 위로 혼배성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양 팔이 올라갔다. 90mm 렌즈로도 자세히는 보이지 않는 신부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신랑 곽성호 빈첸시오 빠울라는 신부 이양지 프란체스카 로마나를 맞이하여 하느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갑자기 눈 앞을 가득 채웠던 웨딩드레스가 휙 멀어지고 작아졌다. 우주 속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듯..... 종범은 몇 초가 지나고야 자신이 카메라를 든 손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음을 깨달았다. 망원렌즈의 화각이 그냥 두 눈의 시야로 바뀐 것이다. 팔이 카메라째 힘없이 처져 덜렁거렸다.
그 순간, 오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다. 물론 성당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몇 초 동안 수 백명의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신부님의 성혼선언에 귀기울이고 있었고, 십수명은 카메라를 들고 그 순간의 신랑 신부를 촬영하고 있었고, 서너명은 식의 진행을 돕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닥과, 바닥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진 자신의 손과, 그 손에 들린 검정 페인트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로마나......"
"사장님한테 M4 시리얼에 대해서 묻더라는 거죠?"
"네, 몇 번부터 몇 번까지가 69년에 만들어진 거냐고.... 제가 잘 모른다고, 딱 몇 번부터 몇 번 이렇게 나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해당 안되는 시리얼도 있고, 하여튼 자세한 건 정리해놓은 표를 인터넷에서 찾아보라고.... 말해 드렸지요"
"......."
"혹시....."
"네?"
"이런 말씀 주제넘지만.... 혹시 여자친구분 부모님 중 많이 편찮으신 분이 계신가요?"
"아니.... 아, 네.... 어머님이 지병으로 당뇨가 있으신데....."
"지난 번 오셨을 때 누군과와 통화하면서 삼십분 넘게 우셨어요. 언뜻 들으니 어머니인가 하여간 병세가 나빠졌다나 합병증이라나 해서 조만간 큰 수술을 해야할 것 같다고...."
"......"
"아휴, 죄송합니다. 제가 낄 데 안낄 데 못가리고 이거 참...."
주인은 괜히 말을 꺼냈다는 표정으로 다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을 챙겨 카운터 안쪽으로 황급히 들어가버렸다.
종범의 머리 속에 이틀전 자신 앞에서 정중하고 차갑던 양지 어머니의 모습과, 시리얼 맞는 M4를 찾아 잘 알지도 못하는 충무로 샵들을 전전했을 양지의 모습과, 수백 만원 짜리 L렌즈들을 한 번에 몇 개씩 척척 사들이는 성호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종범은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아무것도.... 떨쳐지지 않을 것을 사실은 그도 알았다.
"형, 와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성호는 정말 의외라는 듯한, 그리고 정말 고마워하는 표정으로 종범의 손을 마주 잡았다.
"저희요.... 형한테 보란 듯이 잘 살 겁니다. 형도, 그렇게 되길 바라죠?"
"어 뭘 그런 소릴 하냐 기쁜 결혼식날. 오늘은 니가 주인공이다. 니 날이다. 나야 너 축하해주러 온 손님이구"
성호와 말을 놓은 건, 그와 두 번째 만났을 때부터였다. 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지만, 남과 말을 잘 놓지 못하는 종범이 성호에게는 쉽게 호칭의 벽을 넘어섰다.
"어? 사진도 찍어주시려나 봐요? 와~ 기분 정말 좋아지는데요. 동호회 최고의 웨딩전문가에게 사진을 찍히다니~"
성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종범은 그저 빙긋 웃어주고 눈인사를 한 후 입구를 넘었다. 등 뒤로 성호의 표정이 바뀌는 게 느껴졌다. 등 뒤가 축축해지더니 뜨뜻해지더니 그리곤 서늘해졌다.
사진동호회의 두 회원이 결혼하는 자리답게, 식장 곳곳엔 카메라들이 넘쳐났다. 요즘이야 어느 결혼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덩치 큰 SLR 디카들 사이에 군데군데 작은 M바디나 포익틀랜더 R바디를 목에 건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게 다른 점이었다. 그렇지만 그 RF들도 M6, M7, R2A나, 혹은 MP였지, 종범처럼 노출계도 안달린 M4를 들고 온 사람은 없었다. 종범도 결혼식장에 노출계 안달린 RF 카메라를 들고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기야 성당의 높은 천장은 SLR 카메라들의 플래시로 바운스 조광할 수도 없었고, 어지간한 망원렌즈로 프레이밍하기에도 너무 깊고 넓었다. 종범은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하객들이 앉은 가장자리 벽을 따라 조용히 걸어 앞쪽으로 나갔다. 어차피 다른 사진사들이 많으니 굳이 신랑신부 바로 옆까지 다가가 찍을 필요는 없었다. 의자들 가장 앞 열까지만 다가서면 된다. 그래서 종범은 90mm 엘마리트 렌즈를 가지고 온 것이다. 씬 버전의 구형 렌즈는 중고가격이 싸면서 크기도 작고 가벼워서 오늘의 용도에 딱 맞았다. 어차피 오늘 하루 쓰고 팔려고 구입한 렌즈였지만, 종범은 왼손으로 소중히 렌즈를 감싸 잡고 또박또박 걸음을 떼어 놓았다. 노출값 같은 건 양발을 번갈아 움직이는 리듬처럼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지는 것이었다.
식은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있었다. 신랑 신부의 머리 위로 혼배성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양 팔이 올라갔다. 90mm 렌즈로도 자세히는 보이지 않는 신부의 어깨가 살짝 흔들리는 것도 같았다.
"신랑 곽성호 빈첸시오 빠울라는 신부 이양지 프란체스카 로마나를 맞이하여 하느님이 정하신 뜻에 따라...."
갑자기 눈 앞을 가득 채웠던 웨딩드레스가 휙 멀어지고 작아졌다. 우주 속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듯..... 종범은 몇 초가 지나고야 자신이 카메라를 든 손을 아래쪽으로 떨어뜨렸음을 깨달았다. 망원렌즈의 화각이 그냥 두 눈의 시야로 바뀐 것이다. 팔이 카메라째 힘없이 처져 덜렁거렸다.
그 순간, 오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일어났다. 물론 성당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몇 초 동안 수 백명의 사람들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신부님의 성혼선언에 귀기울이고 있었고, 십수명은 카메라를 들고 그 순간의 신랑 신부를 촬영하고 있었고, 서너명은 식의 진행을 돕고 있었고, 한 사람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닥과, 바닥 아래쪽으로 늘어뜨려진 자신의 손과, 그 손에 들린 검정 페인트의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프란체스카 로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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