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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소설] 버쓰이어 (Birth-yea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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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6-03-3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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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 시작 삼십 분 전에 도착하는 건 그의 오랜 버릇이다. 어떨 때는 아직 메인 사진사도 도착하지 않은 시간에, 심지어 앞 예식의 하객들이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식장에 도착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천정의 높이며, 조명이며, 신부대기실의 깊이 등을 확인하기도 하였다. 특별히 꼼꼼하게 맡은 일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 꼼꼼함과 성실함이 그를 이루는 거의 전부다. 친구와 후배들이 그에게 결혼식이나 돌잔치 스냅 촬영을 부탁하는 것도 그런 그를 알기 때문이다.

"야, 넌 명색이 찍사라는 놈이 웨딩 촬영에 RF를 들고 오냐! 한두번 찍어보냐!"
낡을 대로 낡아 캔버스천의 올이 너덜거리기 시작한 돔케 F6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그를 보며 영수가 꽥 소리를 지른다.
"아 참 형도, 내가 무슨 포토그라퍼에요, 그냥 월급쟁이 사무원이지"
"임마, 홍보실에서 니가 찍은 비디오만 테입으로 한 트럭이겠다, 그것도 촬영이라면 촬영이지. 그리고 너 니네 부서 DSLR도 자주 쓰잖아? 그건 카메라 아니고 컴퓨터냐? 그만한 경력이면 포토그라퍼지, 암~ 포토그라퍼도 그냥 포토그라퍼냐 프로다 프로!"
영수는 오는 차안에서부터 내내 시비조다. 뭐가 그렇게 골이 났는지, 옆 차로에서 끼어들던 차를 본 척 만 척 급가속해 접촉사고를 낼 뻔 하지 않나, 그 운전자에게 냅다 상욕을 퍼부어 큰 싸움을 만들 뻔 하질 않나, 사람 좋기로 동호회 최고라 소문난 이답지 않은 신경질이다.

그럴 법도 하다. 양지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종범보다 더 펄펄 뛴 사람이 영수였다. 영수뿐 아니라 종범과 양지가 사랑하는 사이인 걸 모르는 동호회 사람은 없었지만 둘 사이의 사연을 그래도 남보단 조금 더 아는 영수는 자기 일처럼 분통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자기 일처럼 가슴아파했다-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어쨌던 겉으로 보이기로야 그건 신경질이고 화이고 분노였다.

"어쭈, 너 M4는 언제 샀노? 얘가 돈 없다는 말도 맨 헛말이네, 블랙페인트 M4라니.... 너 양지 결혼한다니까 눈이 뒤집어졌냐? 다음달에 어머님 칠순 잔치 때문에 적금도 깨야한다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영수는 매끄러운 블랙 페인트 도장을 연신 손가락 끝으로 매만진다. 라이카의 오리지널 블랙 페인트는 어떤 사람이든 홀리지 않고는 못배길 순흑의 아름다움과 질감을 가지고 있다. 순흑의 아름다움은 모를까, 순흑의 '질감'은 또 무언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이지만 그건 분명히 '말'이다. 라이카란, 그런 카메라다.

"형, 그냥 샀어요. 마침 반도 최과장이 싸게 준다길래...."
"싸게 준다고 다 사냐? 니가 무슨 콜렉터냐? 아이고... 관두자 관둬, 하기야 너 M4 그렇게 갖고 싶어했다 아이가, 양지 그 기집애 그렇게 한 번 빌려달라 그래도 그 잘난 M4 한 번 너 안빌려주더니.... 에이, 잘했다 마, 잘 질러삤다"
"네......"
종범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렌즈를 꺼내 M4에 달려는데 영수가 생각난 듯 물었다.
흥분했는지 잠깐 사투리가 비치더니, 다시 서울 말씨다.
"이거, 버쓰이어 바디야?"
"네....."
영수가 뭔가 한 마디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종범은 묵묵히 렌즈를 결합한다. 딸깍- 마운트에 렌즈 기부가 맞물리는 소리가 사소하고, 냉정하다.

M4는 1966년부터 1975년까지 생산되었다. 다른 M바디들과 마찬가지로 생산년도마다 도장과 세밀한 부속의 차이가 있다. 종범이 꺼낸 M4는 그중 1969년 생산된 것으로, 블랙페인트 버전이다. 1969년은 종범이 태어난 해다. 즉 이 까만색 페인트가 칠해진 작고 정교한 카메라는 종범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것이다. 말끝마다 버쓰이어 타령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작 자기가 태어난 해의 바디를 소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생년에 마침 자기 마음에 드는 바디가 생산되었어야 하고, 그 바디를 실제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구입할 돈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카처럼 오래된 바디의 중고가격이 오히려 훨씬 비싸기 십상인 물건이라면 버쓰이어 기기를 소유하기란 더더욱 힘든 일이다.

"그런데 왜 싸게 준대 최과장은? 새것같이 깨끗한데? 콜렉션급이라도 믿겠다 야"
"전주인이 각인을 했나봐요. 그래서 팔기 힘들다고...."
그 소리에 영수가 바디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눈을 빛내더니, 아- 하고 낮은 탄식을 흘린다.
"여기 있네.... 아 누군지 이 놈도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놈이네~ 무슨 각인을 바닥에다 하냐? 뭐라고 쓴 거야 이게? 로마나? 야, 이거 로마나라고 읽는 거 맞지?"
정말 M4의 바닥 한 복판, 원래 새겨져있던 시리얼 번호나 브랜드의 문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절한 위치에 적절한 크기로, 'Romana'라는 하얀 각인이 보인다.
"이탈리아 사람이 소장하던 바딘가 보네, 야 넌 운 좋다, 이거 잘 보이지도 않잖아. 이거 때문에 싸게 샀다니 천운이다 천운~ 라이카는 역시 주인을 골라 찾아간다니까. 그 기집애 실버 M4보다 훨씬 예쁘고 상태도 좋네. 걔 가고 이거 들어오면 남는 장사다 야. 걔 그거 어려서 어디 쓸 데가 있냐, 생각하는 것도 어린애고.... 그런 애 데리고 살면 너만 고생해 야. 잘 된 거야 차라리.

종범이 돌아보지도 않고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잘 된 일이 맞다. 누구를 위해서 잘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누군가 한 쪽에게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잘 된 일일 것이다. 생각하는 게 어린 쪽이 상처받지 않는다면, 더 잘된 일이다. 서른 여덟씩이나 먹은 내가 스물다섯인 양지보다는 더 단단하다. 최소한 상처 하나 없이 수십년의 시간을 이겨온 이 검정색 카메라만큼은 단단하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일포트 델타 100을 장전하고, 하판을 결합하고, 와인딩 레버를 몇 번 감아 필름 카운터가 1에 오게 한 후 종범은 허리를 세웠다. 저 앞이 신부대기실인 것 같다. 신부 친구로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들이 연신 깔깔대며 입구 근처에 몰려서 있다. 종범이 휙휙 빠른 걸음으로 내딛자 영수가 황급히 뒤를 따른다. 예감이 좋지 않다.

신부대기실엔 여자들 뿐이었다.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 그 속에 슥 들어선 종범을 향해 당연히 시선이 쏟아졌다. 1초가 30분처럼 흘렀다. 적어도 영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양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저씨 왔네~ 안찍어준다더니 맘 바뀐 거야? 헤헤 나야 고맙지 뭐~"
영수가 헛기침을 한다. 양지가 바로 돌아본다.
"블러님도 오셨네요? 아이 참 대구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오시면 제가 죄송하잖아요. 식사라도 많이 드시고 가세요. 네?"
종범은 천정 바운스가 가능한지 가늠하려는 듯 천정을 바라보다 바닥을 바라보다를 몇 번 반복하고 있다. 영수는 기가 막혔다. 저 녀석, 플래시도 안 단 RF를 들고 지금.....

"양지야"
예감이 안좋다.... 예감이 안좋다.... 영수는 눈을 질끔 감고 종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흑백 찍는다. 괜찮지? 메인 사진사 불렀을 테니 그냥 난 스냅이나 찍어줄게"
"어 그래요. 근데 아저씨 SLR 안들고 왔네? 회사꺼 못들고나왔나 보당?"
"큐픽에 맡겨놓을게. 니가 그냥 찾아가. 신혼여행 갔다 와서"
종범이 딴 소리를 한다.

몇 컷을 찍고 종범이 뒤돌아선다. 양지는 잠깐 종범의 등을 바라보더니 다시 친구들과의 즐거운 수다에 빠진다. 영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다 종범을 따라 신부대기실을 나온다. 종범의 걸음걸이엔 변화가 없다.

"야! 너 정말 괜......"
뭐라 말하기도 전에 종범이 휙 돌아본다. 언제나 똑같은 종범의 깊고 따뜻하고 차가운 눈을 본 영수는 하던 말을 마저 하고는종범의 등을 툭 치고 먼저 식장으로 걸어간다.

"흑백으로 찍어도 괜찮겠냐고 임마. 그래도 양지 쟤가 얼굴은 예쁘잖냐. 컬러로 찍어도 예쁠텐데...."

식장 입구에 성호가 서있는 게 보인다. 연미복이 잘 어울린다. 잘 어울리는 건 성호일까 성호의 젊음일까..... 종범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고 영수를 제치며 성큼성큼 걸었다.

"축하해 새신랑!"
"어? 형....."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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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최준석님의 댓글

최준석

낯익은 이름의 등장 인물들입니다. ㅋㅋ 잘 봤습니다.
다음편 기대할께요.

참고로 저도 m4...버쓰바디로 가지고 싶습니다. 근데 번번이 기회가 안되더군요...

김영하님의 댓글

김영하

너무 재미있어요.
대부분의 회원분들에게는 가까운 주변의 일들로 느껴지겠군요.^^

정기훈님의 댓글

정기훈

아...흥미진진합니다....잘 읽었읍니다.

최_정원님의 댓글

최_정원

아, 왜 맘이 짠해지지요? 전 아무것도 모르는데...

박장필님의 댓글

박장필

재미있게 읽긴 했습니다만...
이거 왠지 실화인 듯.. 거기다 이 곳 회원분 이야기 인것 같은데...
댓글 다는게 부담스럽네요.
어쨌든 잘 읽었습니다.

현재덕님의 댓글

현재덕

올린지 꽤 지난 글인데도 실화 아니냐는 얘기를 오늘 또 들었습니다 -_- 등장인물 이름을 다 바꿔야 하는 걸까 잠깐 생각합니다.

앞서 밝힌 대로, 이 글은 '픽션'입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라클/포클의 제 지인들에게서 빌렸습니다.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JK이종구님의 댓글

JK이종구

안그래도 분당에서 문성범님을 만나서 사실여부를 캐물었습니다. ^^;;

장욱님의 댓글

장욱

영수래
크 크 크

이준69님의 댓글

이준69

저두 종범과같은 birth-year를 가지고 싶단 생각이 드네여...69 블랙으루..^^
담 편은 언제 나오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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