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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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12-10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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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불통
9월 29일의 가을날 저녁. 창밖엔 휴일 저녁의 고즈넉한 소란. 모래톱을 쓸어내는 수줍은 파도처럼 조금씩 가슴을 덜어내는 용재오닐의 섬 집 아기. 읽다가 만 크빈트 부흐홀츠의 ‘책그림책.’ 돌배 한 개와 소주 한 병. 부드러운 공기 중에 떠도는 약간의 커피 향. 앞발 사이에 코를 묻고, 의자 아래 곤한 잠에 빠진 강아지. 그저 365일 중의 하루.
이건 참 행복하군. 당신은 조용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건 무슨... 이라는 약간의 고개 짓. 나는 이제 당신의 언어를 이해한다.
꿈꾸어 오던 일들이 작은 욕심들 때문에 망신창이가 되고, 결국엔 믿지 못할 세상 따위는 나도 필요 없다며 숲에 칩거하던 나날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은, 결국 네가 바보인 탓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세상. 웃는 낯으로 나를 찾아와서는, 이정도면 됐지 않느냐며 작은 소망을 훔쳐 달아나는 얼굴들. 그런 야바위 짓에 넌덜머리가 나서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혼자만의 선언을 하고, 오두막에 숨어 감자 굽는 향기로 시름을 잊으려 했던 그 암울한 시간들.
끝도 없이 찾아오는 불운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어. 불운은 이 세상 끝에 아무리 꼭꼭 숨어도 늘 미소와 달콤한 희망을 앞세우고 반드시 나를 찾아왔지. 소중한 것들은 망가지고, 돈도 없었지. 희망은 뿌리까지 뽑혀서 너덜거리고 있었어.
그때 당신이 내게 왔지. 당신은, 고치 속의 누에처럼 깊은 숲 속에서 완전한 고독에 싸인 내게 찾아왔어. 당신은,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내게 손을 내 밀었지. 이제 함께 세상으로 나가요. 나는 속으로 말했어. 철딱서니 없는 사람.
함께 하는 동안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많이 상처 입은 고집불통이었을 거야. 그리고 그만큼 당신을 힘들게 했었지. 그래도 나는 당신과 평생을 함께 살 거예요. 어디 언제까지 그러나 두고 보자.
형님 나를 믿어보세요. 아우님 나만 믿어 보게. 내 앞에서 가슴을 펴고 주먹을 흔들던 그 건장한 사내들의 얄팍한 큰 소리와 손바닥 뒤집듯 하는 마음. 그 마음약한 베드로들은 새벽이 오기 전 몇 번이고 이익이라는 바람을 따라 풍향계처럼 이리저리 흔들렸지. 하지만 당신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변함없이 약속을 지켰어. 당신은, 거센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조그만 풍란 같은 당신은, 단 한 번도 그 말을 어긴 적이 없었어.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몰랐어. 당신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절대로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
나를 알고,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을 앗아가기 위해 배신을 하고, 거짓을 말하고, 게다가 자신들의 입장까지 정당화하기 위해 거꾸로 나를 욕하는 사람이 이 세상의 대부분이라고 하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해야 되는 것일까? 그렇게 살면 안 돼. 세상이 본래 그런 것인데, 이해하고 넘어 가야지.
맞아, 모두들 이해하라고 하지. 하지만 그게 이해해야만 하는 일일까? 나는 먼저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아. 그러니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 따윈 조금도 없어. 다만 그들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거야. 이래서 나는 사람을 함부로 사귀지 않지. 상처 받기 싫어서 사람을 가리는 것이 어째서 건방진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백만 번을 돌이켜 생각해도 바뀌지 않을 것 같아. 차라리 그럴 바에는 지구를 떠나고 말겠어. 당신의 나는 결코 그런 남자가 아니야. 이건 믿어도 좋아.
평생 집을 이고 사는 달팽이처럼, 질시와 비난, 배신이 내가 평생 지고 다닐 운명이라고 해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아. 나 자신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을 창안할 것이고 그것을 주장할거야. 이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 미미한 도움이 될 지라도, 내 손이 닿는 한 열심히 일할거야. 그것들을 빼앗기거나,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그런 짓은 늘 신뢰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이 저지르지.) 뻔뻔한 얼굴로 도용한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그만두지 않을 거야. 아무도 몰라준다고 해도 상관없어.
당신은 읽고 있던 '한국의 명 수필'을 가볍게 접으며 입가에 나비 같은 미소를 팔랑인다. 그 미소엔 오늘 저녁엔 웬 큰 소리세요? 라는 질문이 담겨있다. 나는 남은 소주잔을 마저 입에 털어 넣는다.
건방진 소리 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가 완전히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줄 사람을 한 명 알고 있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언제까지고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 줄 것이라는 것도 알아.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이해받지 못해도,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고집불통으로 살아도, 나는 결코 외롭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내가 두려워 할 것이 뭐겠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 둘 중에, 과연 나만 지독한 고집불통일까? 그건 왠지 억울한 걸?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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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가을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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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주홍님의 댓글
김주홍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저도 고집불통인데, 제 곁에 있는 사람은 저보다 더 고집불통인데....
이거 항상 저만 그렇게 고집부린다고 하는 사람에게 왠지 반박을 해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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