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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미지와 세계를 향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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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양정훈
  • 작성일 : 16-06-17 12:06

본문

이미지의 충실한 재현만 두고 본다면 사진만 한 게 없다.
화가나 문학 작가에게 세계의 재현은 고역이 됨과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과 문학을 차별적으로 드러내는 계기가 될 터이지만,
사진은 카메라가 있는 사람이면 셔터만 누르면 누구나 다 똑같이 그리고 아주 쉽게 '있는 그대로, 또는 있는 그 자체'로서의
외부 현상 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에서 차별성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사진은 과학이다. 셔터를 누르면 그냥 찍힌다. 빛에 그냥 작용한다.
최고의 사진가가 셔터를 눌러도 찍히고, 내가 눌러도 똑같이 찍힌다.
그런데 최고의 사진가가 찍어 발표한 사진은 만인이 감동하는 작품이 되고,
내가 찍어 발표한 사진은 그냥 외부 현상 세계를 어떤 신통치 않은 의도하에 잘라낸 장면일 뿐이다.
(물론 최고의 사진가에게도 발표하지 않고 감춰둔 변변치 않은 사진이 많겠지만)

사실주의적 묘사를 즐겨 구사하는 토마스 만의 작품을 보면 그 묘사가 눈에 보이듯 세밀 구체적이고 입체적이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그의 대표작 <마의 산>에서 할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 대목을 읽어 본다.

"시 참의원 카스트로프는 분홍색 타일을 깐 마루 위에 전신을 보이면서 기둥과 고딕식 아치를 배경으로 서 있었다.
턱을 당기고, 입술을 구부려 다물었으며, 눈물 주머니가 늘어진 밝고 푸르고 생각에 잠긴 시선을 멀리 던지며,
무릎 아래까지 내려간 법관복 같은 길고 검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이것은 앞이 트여 있고 깃과 자락에는 폭이 넓은 털로 장식되어 있었다.
선을 댄 넓은 겉옷 소매 속에서 간소한 천의 좁은 속옷 소매가 보이고, 레이스를 단 소매 끝은 손목까지 덮여 있었다.

늙어서 여윈 발은 검정 비단 양말로 싸였고, 은으로 된 버클이 달린 구두를 신고 있었다.
목에는 풀을 빳빳이 먹이고, 주름이 많은 폭넓은 쟁반 모양의 목도리를 둘렀는데, 앞은 내려오고 좌우는 위로 젖혀져서,
그 밑으로 역시 주름 잡은 모시로 된 가슴 부분의 장식이 조끼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팔 밑으로 차양이 넓은 고풍의 모자를 끼고 있었는데, 그 모자 둘레는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졌다."

토마스 만의 이 대목을 사진으로 처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술적으로는 간단하지 않을까?
할아버지를 기둥과 고딕식 아치에서 조금 떨어져 있게 한 뒤, 할아버지를 도드라지게 표현하기 위하여 역광이나 사광으로 잡고,
(그렇지만 그런 할아버지 표현이 '할아버지다움'을 방해한다면 순광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지긋하게 멀리 시선을 던질 때 재빨리 셔터를 누른다.

한 컷으로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면 다양한 노출과 채광 조건, 할아버지에게서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자세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가장 할아버지 다운' 순간을 찾아 여러 번 셔터를 누른다.
아마 이렇게 하면 '기술적'으로는 할아버지 사진이 완성될 것이다.

토마스 만이 묘사한 할아버지를 채광, 분위기, 위치, 앵글 같은 것을 신경 써가며 사진으로 찍었다.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이 할아버지 사진이 토마스 만이 묘사한 할아버지가 될까? 아닐 것이다. 왤까?
토마스 만의 할아버지 문장 안에는 완벽한 문장 묘사 기술을 넘어서서 토마스 만이 말하고자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토마스 만의 할아버지 묘사는 매우 세밀 정교한 동시에 그 자체로 소설 안에서 역사적이며 문화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다.
독자는 만이 문장으로 세밀하게 묘사한 할아버지의 모습과 의복을 머릿속에서 시대를 넘어 이미지로 전환하면서
할아버지 시대의 삶과 문화, 질서 속으로 들어가 그 의미를 찾을 것이다.

사진에서는 어떨까? 아마 그 반대의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상상력 속에서 사진 이미지를 글과 문장으로 전환할 수도 있고,
사진 이미지 자체를 통째로 개인적 해석의 틀 안에 집어넣어 주관적 변형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폴론적이든, 디오니소스적이든, 그 미학적 분위기 속에서 은은한, 때로는 아주 자극적인 색채와 계조를 드러내는 사실적 이미지.
사진에도 관자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어떤 스토리와 주제가 있다.
사진에서도 미학의 즐거움과 함께 문학에서처럼 무언가가 넣어져 있는, 기술적 완성도를 넘어서는 제대로된 사진이 있다.

이미지의 제시를 통하여 예술의 여타 장르와 마찬가지로 세계를 향해 무언가의 의미를 던지는 사진.
시와 소설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그냥 쓸 수 있는' 글과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회화는 누구나 그릴 수 있는 선과 색채이지만, 동시에 누구나 '그냥 그릴 수 있는' 선과 색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 또한 마찬가지여서, 누구나 다 사실적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다 "그냥 찍기만 하면' 만들어내는 사실적 이미지만은 아니다.

파리에서 일간지 특파원 생활을 하던 젊은 헤밍웨이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작품을 쓰며 습작작가 생활을 했다.
완벽한 문장의 기술만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이라 생각하며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헤밍웨이는 뤽상부르 박물관에 걸린
인상파 화가 세잔의 그림을 보고 자신의 작품에 무엇이 더 필요한지를 비로서 깨닫는다.
바로 "단순하고 진실한" 완벽한 문장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자신의 작품에 무언가를 불어넣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배가 고플 때 세잔을 더 잘 이해하는 걸 터득했고, 그가 어떻게 풍경을 그렸던가를 진정으로 꿰뚫어 볼 수가 있었다.
세잔의 그림들은 내가 내 작품들에 부여해주고자 하는 차원들을 얻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진실된 문장을 쓰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걸 내게 깨닫게 해주었다.
....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란 대체 무엇이며, 또 어떤 것에 대해 나는 아직 쓰지 않았고 잃어버리지도 않았단 말인가?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주제가 나의 관심을 끌고 있단 말인가?" *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에서

오늘 다시 나의 사진을 들쳐보았다.
카메라를 만진 지 삼 십 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까지 난 그냥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엘리어트 어윗, 유진 스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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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조진은님의 댓글

조진은

사진 찍기가 쉽듯이 사진 보기도 쉬운데 사진 읽기가 어려운 거 같습니다.
서로의 사진을 읽어 주던 그 시절이 많이 그립네요.

김형옥님의 댓글

김형옥

아침에 택배온 '사진직설'을 읽으면서 여러번 아픈 펀치를 감사히 맞고 있던 중에
선배님이 올려주신 글로 카운터펀치 맞고 정신이 몽롱합니다.
개인적으로 '왜?'라는 단어가 자주 자문되어 혼란스러운 요즈음입니다.
정신들면 저도 제 지난 사진들 들쳐봐야겠습니다.
강펀치... 감사합니다.

이상호58님의 댓글

이상호58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끼고...
많이 배워봅니다...

감사합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얼마전 영화 '라이프'에서 제임스딘을 찍기위해 그의 시골에까지 동행한 데니스 스톡이
눈과 마음으로 보면 보이는 절정의 장면들이 카메라를 들어올려 뷰 파인더로 보면 볼 수 없었던 고충을 쬐끔이나마 알것 같았습니다.
선배님 글을 읽고나니... 다시 숨통이 트입니다. ^^
그나마 보여주기 위한 사진이 아닌 보기위한 사진을 하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언제나 시한편 쓰지 못한 세월처럼... 사진 한장 걸어놓지 못하는 바보가 될 것 같습니다.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김승현님의 댓글

김승현

재현은 과학이나 언어나 모두 변형의 문제를
동반하는듯. 그만큼 상상력이 그자리를
매워주는거.아닌가요?
초여름에 이런전문적인 글을보니
싱그럽습니다 . 강웅천님 댓글도
자꾸보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이치환님의 댓글

이치환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란 대체 무엇이며,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에서

윗 글이 핵심 같습니다.
"사진 이미지와 세계를 향한 의미"라는 글제가 무겁고 거창해서 심각하게 읽었는데,
마지막 글에서 무겁고 뭔가 막힌 것 같았던 공간에서 해방된 기분이 듭니다.

이태영님의 댓글

이태영

인용:
원 작성회원 : 이치환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란 대체 무엇이며, ......내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에서

윗 글이 핵심 같습니다.
"사진 이미지와 세계를 향한 의미"라는 글제가 무겁고 거창해서 심각하게 읽었는데,
마지막 글에서 무겁고 뭔가 막힌 것 같았던 공간에서 해방된 기분이 듭니다.


헤밍웨이가 사용했다는 카메라네요... ^^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인용:
원 작성회원 : 이태영
헤밍웨이가 사용했다는 카메라네요... ^^


IIIF 셔터에 끼워놓은 셔터 보조 장치가 궁금해집니다. ^^
사진을 확대해서보니 셔터 보조장치가 아니라 렌즈 초점링 컨트롤 용도인 듯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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