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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RUCE DAVIDSON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이태영
  • 작성일 : 04-08-08 00:25

본문

American, b.1933

Bruce Davidson began photography at the age of ten in Oak Park, Illinois. In 1949, at the age of 16, he won his first prize in the Kodak National High School Competition. He went on to attend the Rochester Institute of Technology and Yale University. After military service in 1957, he worked as a freelance photographer for Life Magazine and in 1958 became a member of Magnum Photos, the international photography agency.

Davidson continued to photography extensively from 1958 to 1961 creating such bodies of work as "The Dwarf", "Brooklyn Gang", and the "Freedom Rides". He received a Guggenheim Fellowship in 1962 to photograph what became a documentation of the "Civil Rights Movement". This work included images from an early Malcolm X rally in Harlem, steel workers in Chicago, Klu Klux Klan cross burnings, migrant farm camps in South Carolina, cotton pickers in Georgia and the protest marches and demonstrations in Birmingham and Selma, Alabama. In 1963 the 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 presented his work in a "one man" show that included, among others, these historically important images.

In 1966 he was awarded the first grant for photography from the 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 and spent two years documenting one block in East Harlem. This work was published by Harvard University Press in 1970 under the title "East 100th Street". The work became an exhibition that same year at the 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

Partial Bibliography

The Bridge, 1964
The Negro American, 1966
East 100th Street, 1970
Subsistence USA, 1973
Bruce Davidson, Photographs, 1978
Bruce Davidson, 1984
Subway, 1986
Central Park, 1995
Photo Poche 14, 1994
Brooklyn Gang, 1959, Published Nov. 1998
Portraits, 1999

..

그의 할아버지는 미국으로 이민해 온 유태계 폴란드인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섯 살 때 이혼했고, 그래서 어머니와 동생들은 조부모님 댁에서 살게 되었다. 한편 그의 어머니는 그와 그의 동생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을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외톨이가 되기 일쑤였다. 부모님의 이혼, 할머니의 죽음, 그가 거의 보지 못했던 아버지라는 작자와 거의, 집에 없었던 어머니, 이런것들은 그의 외로움에 대한 선호 사상, 가족들에 대한 일종의 초연함 같은 것들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줄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사진을 발견하게 된 날부터 변했다. 사진현상작업에 그를 데리고 간 한 친구 덕택이었다. 요술같은 작업과정, 화공약품들의 냄새, 암실 속에서 흘러내리던 물, 이런 모든 것이 그를 사로잡았다. 신문배달을 하면 번 돈으로 열 살에 그는 사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어 양부는 그를 위해 암실을 만들어 주었고, 확대기를 사주었고, 비싼 인화지를 그에게 주었다. 이 모든 배려와 친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점점 이 가정생활에 잘 적응해 가지 못했다. 학교성적은 신통치 못했고 점점 자폐되어 외톨이가 되었다. 반대로 그는 밤에 외출하여 사진기를 들고 시카고의 밤거리를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양부는 입학허가를 얻어내기 위해 사진 대학교인 로체스터 이공대학 R.I.T.에 편지를 썼다. 그 학교에는 랄프 헤터슬리라는 훌륭한 교수가 있었다. 그는 로버트 프랭크, 유진 스미스, 까르띠에 브레쏭의 사진들을 깨닫게 해주었다. 특히 까르띠에 브레쏭의 사진은 그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4학년 말 뉴욕에 있는 이스트먼-코닥 회사에 채용되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웠던 작업들은 너무 판에 박힌 것이라서 견디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일 디자인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형태의 아카데미즘도 견뎌낼 수 없었다. 길거리가 더 좋았고 거기서 그가 직접 찾아내는 것들을 더 좋아했다. 그런 그는 차라리 "라이프"지의 사진기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예일대학의 축구팀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그는 군에 입대했다. 거기서 "라이프"지에 그의 사진이 실린것을 볼수있었다. 그후 그는 장군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처지가 되었다. 1957년 그는 뉴욕으로 돌아와 "라이프"지를 위해 일했다. 기술을 터득해 나가기 시작했고, 아주 나쁜 조건 속에서도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사진에 큰 실망을 느끼게 된다. 그가 사진에 담는 것과 정서적인 유대를 세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유진 스미스의 사진들은 그의 방도를 일깨워주었다. 스페인의 마을이나 조산원, 혹은 슈바이처 박사에 대한 유진 스미스의 사진들은 사진을 통해 정서를 일깨워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뉴욕의 길거리로 돌아왔다. 그는 뉴저지에 천막을 가설한 조그만 서커스단을 쫓아가서 지미라는 한 난장이에게 집중적으로 매달렸다. 이 연작을 마치고 그는 주문 제작 방식으로만 일을 했다. 이어서 그는 부랑배들 집단 가운데 하나인 조커패거리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들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닐수 있었다. 그것들은 "에스콰이어"지에 실렸다. 1960년 그는 매그넘사를 위해 일했다.


어느날 "보그"지의 편집장에게 불려가서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성공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이 패션 세계가 그에게는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난장이나 부랑배들과 어울려 만들었던 사진들에 향수를 느꼈다. 61년 그는 앨라배마로 떠났다. 당시 그곳에서는 흑인들을 탄압하는 여러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잭슨에서는 일제 검거가 있기도 했다. 그는 거기에서 폭력과 증오의 광경을 목격했다. 다시 의상사진을 찍고 결혼을 하기위해 뉴욕으로 왔으나 구겐하임 지원금으로 여러 겸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의상사진과 그가 직접목격한 사건들 사이의 수렁이 점점 깊이 패여갔다. "보그"지와의 일은 64년말로 끝났다.


그는 샤의 사진을 찍기 위해 이란 여행길에 올랐다. 그후 그는 사진 스튜디오를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65년 봄, "에스콰이어"지는 그를 샌프란시스코에 파견하여 '토플리스'식당에 대한 르포르타쥬를 만들게 했다. (그곳의 여자종업원들은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주제는 여인들의 벌거벗은 모습이 아니라 그녀들의 외로움이었다. 66년말 어떤 사람들에게는 가장 못 살 동네인 동부 100번가에 특히 흥미를 갖게된다. 그는 그곳의 주민들이며 허물어져 가는 집과, 건물, 황량한 공터, 지붕등 모든것을 사진에 담았다. 그 사람들과 그들의 생활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는 그들의 삶을 보다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간혹 그는 파렴치해야만 했고, 그들의 비참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2년간 하고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68년 늦여름, 그는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80년 봄 그는 뉴욕의 지하철에 각별히 흥미를 갖게 되었다. 자하철이 가축을 실어나르는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에 짓눌려 있은 것 같았다. 그는 이 굳어져 있고 상심한 표정들, 흉칙하고 무표정한 인상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81년 2월부터 그는 전적으로 지하철 사진에만 몰두하기 위해 모든 계약을 취소해 버렸다. 거기서 그는 삶과 생존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이리하여 그는 비참과 명예, 아름다운 사람들과 심술궂은 사람들, 관용과 증오 등등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 즉 그와 타인들의 삶의 심장부에 까지 갔었던 것이라 믿고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은 그의 대표작중 하나인 Subway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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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태영님의 댓글

이태영

.. .




















최준석님의 댓글

최준석

이태영님이 올려주신 BRUCE DAVIDSON 자료 잘 보았습니다.
저는 처음 접하는 작가였으나 처음이름의 생경스러움 만큼이나 충격을 받고 갑니다.
그의 사진과 삶에...
작가는 정말 타인의 삶의 심장까지 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좋은 자료 감사드립니다.

권기찬님의 댓글

권기찬

1980/1~뉴욕 지하철사진이군요.코다크롬 64로 찍었다던데... 동부100번가 사진도 있는듯하군요.
조커패거리 사진도 있군요^^사진 잘보았습니다.

강준호님의 댓글

강준호

지하철 시리즈가 특히 맘에 드는군요...
이런 사진을 찍을땐, 피사체와의 사전교감이나 교류없이 캔디드 스타일로 찍었을텐데도 모델이 되어준 피사체들의 표정이나 느낌이 참 좋네요... 이런곳에서 카메라를 들이댈수있는 작가의 과감함보다는 그런 작가의 카메라에 거부반응을 보이지않는 그들의 여유와 정서가 부럽습니다...아마..우리나라 지하철에 Bruce Davidson이 와서 이런사진을 다시 찍으려해도...우리 국민의 정서때문에 힘들지 싶습니다... 사진을 찍는걸 좋아하는 제 자신도 누가 길에서 절 찍으려하면 피하게 되더라구요..

이장섭님의 댓글

이장섭

잘 보았습니다. 저 역시 지하철 사진....참 묘하고 멋지네요.

노왕구님의 댓글

노왕구

잘 읽어보았습니다. Bruce Davidson의 사진을 잘 정리하셨네요. 참 좋은 사진들입니다. subway series는 색감도 좋고 내용도 풍부하지만 한 주제에 오랜시간 집중력있게 작업하는 그의 docmenutary 스타일에 반하게 합니다. 좁은 실내에서 이런 접근이 가능한가? flash를 터뜨리고도 무사할수 있을까? 아시다시피 밤늦은 시간 지하철 객실안에 흑안과 단둘이 남아있을라 치면 느끼게 되는 어쩔수 없이 긴장감을 겪어보신분이라면 뉴욕의 지하철안에서 작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해하실 것입니다. 총을 들고 누군가를 위협하는 흑인 남자, 술 또는 필경 마약에 취해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클로즈업 사진등.

동 100백번가는 더욱 위험한 일이었죠. view camera로 찍은 일련의 흑백작업물은 정교한 디테일, eye to eye contact에 의한 사실주의적 묘사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진이었습니다. 이런 소재가 작업의 대상이 될수 있는 것인가? 이토록 시시콜콜이 드러내어도 괞찮은 것인가? 하는 반응도 있었지요. Koudelka의 gypsy series도 있지만 미국인으로서 뉴욕의 어쩌면 감추고 있어도 괞찮았을 슬램가의 부엌까지 드러내고 찍은 magnum작가인 셈입니다. localty에 충실한 사진이 보편적인 공감을 불러내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범죄와 가난의 온상인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란 것이죠. documentary의 바탕이 되는 휴머니즘과 인물하나 하나의 깊이있는 묘사에서 오는 예술적 성취를 동시에 이루어 낸 작업이라고할수 있습니다.

아마, 사진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에 대한 많은 암시를 주는 부분은 특히 이 작업을 시작하고 진전시킨 그의 집요하고도 또한 인간적인 노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메라 들고 들어가기, 한명 한명에게 증명사진 찍어주겠다고 제안, 다시와서 사진을 주고, 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늘리고, 친해지고, 급기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의 집으로 가고 거실, 부억, 심지어는 침실까지 찍어대는 일련의 순서를 밟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의지를 가지고 늘어지고 설득하기 전에 마음을 사고, 또한 여는 과정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사진을 보니 그의 사진이 주는 아름다움과 생명력이 새삼스럽네요. 사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최민호님의 댓글

최민호

BRUCE DAVIDSON ! 참 오랜 만에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그의 subway 작업시, 같이 참여 했던 assistant가 지금 한국에서 열심히 사진활동 중인
박기호란 사진가 입니다. (그는 한국의 유명 화가 고 박고석씨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이운식Banjul님의 댓글

이운식Banjul

어떤 학생과 박기호 선생의 인터뷰가 있는곳 입니다

스튜디오 안밖 사진등도 같이 있네요

http://www.fotato.com/webzine/featur...ch=&txtsearch=

현규용님의 댓글

현규용

좋은 소개글 감사드립니다.

아래 실린 흑백 작품들에서는 브레송의 사진들에서 보던 느낌이 실려 있네요.

김종덕님의 댓글

김종덕

대단하군요...

역시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나봅니다..

끝임없이 고민하고 찍어데는 수밖에는...

김춘호님의 댓글

김춘호

저희 교수님께서 말씀해주셨는데
브루스데비슨의 사진전 같은 경우 미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동부100번가 같은 경우 전시가 시작되면서 동부 100번가는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고 운동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건물 하나는 박물관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지하철을 찍을 당시에는 카메라 가방안에 응급처치 상비약과 진통제와 주사기도 준비하였고 팔에는 돈을 꼽고 다니면서 지하철 사람들을 촬영하였다고 합니다.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합니다.
써놓고 보니 두서가 없네요....

박지은님의 댓글

박지은

좋은 사진 잘 보았습니다.

박지수님의 댓글

박지수

^-^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박기호선생님에게 사진을 처음 배웠었습니다.

그래서 브루스 데이비슨도 자주 접했었죠,

정말 멋진 사진들입니다.. ^-^

이병선님의 댓글

이병선

좋은 자료와 설명 감사합니다.

아래쪽에 있는 사진은 Central Park이라는 사진집에서 본 사진이 많이 있네요
(가진 것이 이뿐 이라 다른 사진집에 실렷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다른 사진집들도 구해 보고 싶네요,

하광용님의 댓글

하광용

사진의 생동감을 전해주는 걸작사진들을 잘 감상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때로는 기분이 느슨해진 때에, 이 작가의 사실적인 현장감과 배경설명들

이 나자신에 큰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사진대상에 더 적극적으로 접근해야겠다는 의욕을

주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이 가을에 좋은 결실을 준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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