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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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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이태영
  • 작성일 : 03-07-08 12:06

본문

"소설속에서 인물을 내게 묘사해주는 그 모든 성격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인물이나 사물에 비교해봄으로써만 그 인물을 알게 해줄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그 인물을 부호적으로 표시하는 기호에 불과하다. 따라서 부하나 관점은 나를 그 인물 외부에 위치시킨다. 그것들이 내게 주는 것은 그 인물이 다른 인물과 공통으로 지니는 것뿐이며, 그에게 고유한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 볼 때 절대는 단순한 것이지만, 외부에서 고찰되었을 때, 즉 다른 사물에 상대적으로 취해졌을 때, 절대는 그것을 표현하는 부호와의 관계상 언제까지 가도 화폐로 바꾸어줄 수 없는 금조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불가분적으로 파악되는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세어지는 것은 본래 무한한 것이다."

"분석은 대상의 주위를 돌도록 운명지워져 있으면서도 그 대상을 포착하려는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이런 욕망 속에서 분석은 끊임없이 관점을 증가시켜가면서 언제나 불완전한 표상을 완성시키려 하고, 쉼없이 부호를 바꿔가면서 언제나 불완전한 번역을 완성시키려한다. 그리하여 분석은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나 직관은 그것이 가능한 경우에는 하나의 단순한 행위인 것이다."

그렇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던것 같습니다. 가슴으로 와닿는 그런 사진, 아니 작품들을 좋아해 왔던것 같습니다. 망치로 후려친듯한 일순 깨어짐과 공명을 남기는 그런 작품들 말입니다. 그 안에 담긴 복잡다단한 시공간의 무게를 재어볼 필요도 없이 하나의 실존대 실존으로서 마주칠때 느끼는 그 체험 말이에요. 요제프 쿠델카의 사진들을 보면서,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들을 보면서 마주치는 정서적인 충격과 공감 그리고 그 울림은 결코 이론적인것도 아니고, 이성적 납득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들이 결코 말초적인 것만도 아니었지요.

일전에 제가 한점 올린 사진으로 인하여 한분이 달아주신 답글을 보곤 그런 생각을 문득 했더랍니다. 도대체 공감이란 무어지? 충격이란, 울림이란 그 파괴적 속성의 본질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무엇이 나를 뒤흔들어 놓는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았더랩니다. 베르그송의 표현대로라면 사물의 내부로 우리자신을 집어넣음으로써 느낄수 있는 결코 기호와 부호로는 도달할 수 없는 총체적인 반응인 것이겠지요. 더이상의 코멘트도 무의미하고, 정치나, 철학이나 종교가 소멸해버리는 그저 그 자체로서의 무게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감정일겁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과연 절대적인 하나의 지향의 합일일까? 하고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베르그송의 운동에 대한 정의는 늘 머리속에서의 절대의 공간, 즉 말그래로 형이상학의 공간속에서만 일어나는 운동이란 거지요. 현실속에서는 그렇게 상정할만한 절대적 지향의 한 점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사물의 내면으로 들어갈 수 가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격이라고 울림이라고 공감이라고 말하며 느끼는 감정은 다 무얼까요? 내가 사물에 대해 느꼈던 하나의 충격의 물량적 측면이 절대적으로 과연 누군가 다른 이의 가슴에서 일어나느것과 동일한 것일까요? 만일 그것이 절대를 상정하는 하나의 지향이라면 능히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현실에선 그런 일이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에요. 말그대로 동상이몽인게지요. 우리는 하나의 작품을 통해 각자의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어있지않습니까? 우리가 공감이라고 부르는 집단최면 또는 집단환각속에서 꿈꾸어 온 바로 그 지향점이야말로, 우리 인식의 지평 너머에 존재하는, 말그대로의 이상향인것이겠지요.

가끔 여러작품을 감상하며 느꼈던 그런 감정들을 누군가와 나누다보면 전혀 다른 지점에서 서로의 감정의 재반응이 일어나고 있다는걸 발견하게 됩니다. 동일한 언어를 이야기 하고 있는지 알았는데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거에요. 물론 그 표면은 동일하거나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말이에요. 직관인지 감각인지 감정인지가 모호한 그런 뒤죽박죽의 상황속에서 서로가 공감을 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며 서로 다른 지향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을 종종 겪곤 합니다.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 커머셜한 작품들은 비교적 순수하고 정직한 편이지요. 그것의 지향이 가져오는 결과가 오히려 순수예술작품의 경우보다 더 합일된 반응을 끌어들이는 편이 많지요. 그런 측면에서 직관이 가져다 주는 정서적 재반응은 순수의 측면보다는 커머셜한 경우에 더 적합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직 저 스스로 그의 직관적 방법론에 대해서 감각적 방법론과의 차이를 그다지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탓도 클것이라 생각됩니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올바른 관객을 정의하며 관객이란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선보일때마다 그것에 공감하며,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라고 격려해주며, 그에게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감과 격려 그리고 대화는 어느지점에서 일어날까요? 오히려 그것은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종교적 위치에서 논리로써 일어나는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이전에 차이밍량의 하류라는 한 작품을 평한 한 평론가가 그와 직접 인터뷰를 하적이 있었죠. 작품속에 나타난 자전거가 지나가는 다리너머의 어렴풋 나타난 도시의 흐린 전경을 보며, 가부장적 역사와 그 무게에 대해 정확하게 집어내어 서로 그것을 나누는 장면을 보고선 오히려 올바른 공감이란 올바른 정치관과 철학적 세계관의 합일에서 오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햇더랍니다. 철학적 사유의 길은, 적어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신념의 투쟁의 공동선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지이며, 함께 걸어가는 친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죠. 왜냐면 그 길이야말로 작가와 합일되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외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되어서요.

하나의 작품이 첫눈에 던져주는 정서적 충격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건 역시 오랜시간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성장과정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과 사상과 사유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맞닥들이게 되는 것.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느끼고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작가와 하나가 되어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것 그것이 아닐까요.

직관은 한걸음에 90걸음을 걸어가지만 결코 100걸음을 걸을 수 없고, 논리와 사유의 걸음이야 말로 한걸음부터 시작하여 결국은 100걸음의 그곳에 도달 할 수 있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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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창근님의 댓글

이창근

안녕하십니까? 이태영님..

조금 난해 합니다.

저는 직관을 좋아하지요.
문득 길을 걸어가다가..이거다..하는 장면이 눈에 문득 들어올때가 있는데..
곁에 카메라가 있어서 촬영이 이루어 지면..거의 좋은 사진이 되더군요.

한데..곁에 카메라가 없어서..장면을 담지 못한 적이 예전에
몇번 있었는데..두고두고..그 장면이 아쉽더군요.
(요즘은 그런 적을 몇번 겪고나니..자연히..비록 똑딱일지라도
습관적으로 외출시에 바디 하나를 가지고 나가게 됩디다..^^

예전에는 롤라이 35나 미녹스가 그 역활을 수행하였는데..
( 한때는 콘탁스 T3이 그 역활을 잠시 수행한 적도 있었고..
하지만..저는 수동이 편하고 좋아..금방 처분하였지만..)

제가 라이카로 완전히 넘어 오면서..M시리즈에 표준하나를
그 역활로 삼다가..역시 기동성이 조금 떨어지고..
고가의 렌즈와 바디라 그런지..마음이 편하지를 못하여..
라이카 바디에서 재차 미녹스로 갔었지요..

요즘요? 허접한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 하나가 그 역활을 수행합니다. 그려~

이귀원님의 댓글

이귀원

일본의 한 평론가는 올바른 관객을 정의하며 관객이란 작가가 하나의 작품을 선보일때마다 그것에 공감하며,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라고 격려해주며, 그에게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친구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공감과 격려 그리고 대화는 어느지점에서 일어날까요? 오히려 그것은 정치적, 철학적, 미학적, 종교적 위치에서 논리로써 일어나는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이전에 차이밍량의 하류라는 한 작품을 평한 한 평론가가 그와 직접 인터뷰를 하적이 있었죠. 작품속에 나타난 자전거가 지나가는 다리너머의 어렴풋 나타난 도시의 흐린 전경을 보며, 가부장적 역사와 그 무게에 대해 정확하게 집어내어 서로 그것을 나누는 장면을 보고선 오히려 올바른 공감이란 올바른 정치관과 철학적 세계관의 합일에서 오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햇더랍니다. 철학적 사유의 길은, 적어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신념의 투쟁의 공동선상에서 우리는 하나의 동지이며, 함께 걸어가는 친구를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것이죠. 왜냐면 그 길이야말로 작가와 합일되어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외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게 되어서요.

하나의 작품이 첫눈에 던져주는 정서적 충격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건 역시 오랜시간의 작가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성장과정을 바라보며 그의 생각과 사상과 사유의 길을 함께 걸어가며 맞닥들이게 되는 것. 바로 그 작품을 스스로 느끼고 바라보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작가와 하나가 되어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것 그것이 아닐까요.

직관은 한걸음에 90걸음을 걸어가지만 결코 100걸음을 걸을 수 없고, 논리와 사유의 걸음이야 말로 한걸음부터 시작하여 결국은 100걸음의 그곳에 도달 할 수 있는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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