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라이카 그리고 감사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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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정승진
- 작성일 : 06-01-1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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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몇 살 때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진을 보면 아마도 서너 살쯤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마당에서 놀고있는 나를 사진을 찍어주시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사진을 계속해서 봐 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날 형들이 다들 학교에 가는 평일 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나랑 마당에서 놀아주신 특이한 날이라 기억이 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분명 기억에는 아버지와 나만이 마당에서 놀았다. 그런데 아버지와 나는 한 사진 속에 등장했다. 도대체 아버지와 나 말고 또 누가 또 있었을까?
그 당시 어머니는 국민학교 선생님이셨다. 분명 어머니는 아닐 테고...
이렇게 해서 아버지와 카메라를 시작해 보겠다.
70년대 초반 나의 작은 아버지들은 두분 다 유럽에 나가계셨다. 들어오시면서 라이카 CL이라는 카메라를 우리 아버지께 선물하셨다. 독일공항에서 그 카메라를 어깨에 메시고 일명 쓰리꾼에게 날치기를 당하셨을 번도 하셨다고 한다. 그 쓰리꾼 왈 “조심하세요 이거 비싼 거에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쓰리꾼이다.
초등학교 때에도 나는 라이카 카메라를 손에 들어보고 만져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역시 나의 손에는 어머니가 언제 사셨는지, 외할아버지가 쓰시던 것이지 모르는 케논 demi17만이 들려질 수 있었다. 지금도 케논 demi17을 보면 후회가 된다. 왜 그때 그걸 그렇게 만졌는지? 이유인즉 케논 demi17의 렌즈 코팅 상태가 엉망이다. 그 당시 내가 렌즈에 먼지라도 묻으면 안경 닦는 천으로 호호 불어가며 열심히 닦았던 기억이 난다. 만약 라이카를 만졌더라면 지금의 CL은 아마도 케논 demi17과 같은 상태가 되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유년기는 케논 demi17과 같이 했다. 그 사진기 정말 좋았다. 24방짜리 필름 한 통 사서 넣으면 2배, 3배의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다. 사진의 품질에 대해서 잘 몰랐던 그때에는 ‘이보다 더 좋은 카메라는 없다’였다. 찍다 찍다 지쳐서 필름을 그냥 빼던 경험도 있었다. 지금도 어딘가에 찾아보면 보통필름의 반만 사용되어 현상된 흑백 필름들이 뒹굴고 있다. 언제 필름 스케너를 사게 되면 이 필름들 스켄해보고 싶다. 지금보면 그 사진기 너무너무 잘나왔다.
소년중앙인지 뭔지 월간 잡지가 있다. 보물섬정도 이다. 아마도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보물섬도 모르시는 분이 계실 것이다. 너무 연세가 많으신 분도 모르실 테고 너무 어리신 분들도 모르실 것이다. 여하간에 그 잡지책을 사면 부록으로 옆으로 기다란 필름카메라를 주었다. 그때 형들과 아마도 그 잡지책을 3권을 산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카메라만 1대씩 나눠 가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들이 모르는 1권이 또 있다. 나는 참으로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그 카메라를 분해해보았다. 분명 분해는 했는데 다시 조립은 하지 못했다. 그래서 1권을 더 산 것이다. 아마도 그때 무슨 돈이 있어서 샀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분명 1대를 망가트리고 또 가지고 싶어서 책을 1권 더 산 기억이 분명하다.
얼마동안 우리집의 사진은 라이카 CL그리고 케논 demi17이 담당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펜탁스 MX를 사오셨다. 엄청난 크기에 나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때가 아마도 국민학교 고학년 때였을 것이다 . 그때 당시에는 라이카보다 좋은 것으로 알았다. 왜냐하면 크기가 너무 크고 또 렌즈도 3개나 있었다. 28, 50, 135 너무 신기했다. 분명 카메라 뒷판쪽에 파이더가 있으나 카메라 앞쪽에는 라이카나 케논과 달리 구멍이 없었다. 너무 신기했다. 나는 당장 카메라를 열었다 필름을 감고 또 셔터를 눌러보고 거울이 있었다. 그때서야 알았다. 우와 너무 신기하다. 이거 너무나도 대단한 기계였다. 아버지도 라이카와 더불어 내가 만지면 안될 품목 중 하나로 추가 등재를 시키셨다. 그 후 난 어디 가서 한번씩 찍어 줄 때만 만질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케논 demi17의 렌즈를 열심히 닦았다. 코팅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한동안 아버지께서는 펜탁스만 들고 다니셨다.
그렇게 해서 나의 유년기는 다 지나가고 어느덧 수동카메라가 아닌 자동카메라의 세대가 왔다. 그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노출계도 없이 맑은 날 125에 11이라는 숫자만 외우고 나머지는 조금씩 조정하여 찍던 수동의 시대가 다 가버린것이다. 일본의 케논 자동카메라가 우리집에 등장한 것이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 즈음이라 생각한다. 아버님 어머님이 일본 가셨다가 사오신 것이다. 사진을 찍는 것이 너무나도 편했다. 결과물도 한장 한장이 다 잘나왔다. 역시 일본 놈들이야 하고 감탄하며 가족끼리 사진도 찍고 또 소풍 가서 친구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때도 라이카는 아버지의 전용카메라 였다. 참으로 다행이다. 내가 만졌더라면 아마도 지금의 상태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던 어느날이 였다.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라이카에 문제가 생겼다. 필름 와인더 레버 플라스틱 부분이 부러져 나간 것이다. 그것을 아버지께서는 순간접착제로 붙이시려다 그만 접착제가 흘러서 카메라 뒷판에 묻어 버린 것이다. 그걸 닦아내시려다가 아버지 손가락마저 카메가 뒷판에 붙어서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낄낄거리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의 라이카 CL에는 아버지의 지문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연유로 난 절대 라이카 CL을 팔 수가 없다. 나에게는 독립60주년 기념판 안중근 M보다 훨씬 소중하다. 아버지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지금생각해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 후 스풀에 문제가 또 생겼다. CL스풀이 약하다는 것은 아실 만한 분은 다들 아실 것이다. 그 스풀의 일부가 부러져 나간 것이다. 고칠 곳도 없었다. 그 당시 인터넷도 없고 우리집이 사진가나 스트디오하는 집도 아니고,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필름은 걸어서 사용할 수는 있었다 왜냐하면 스풀을 보면 필름을 걸 수 있는 부분이 네다섯 개가 된다 다행스럽게도 다 부러진 것이 아니고 그 중 한 개만 부러져 나머지 그곳에 필름을 걸 수가 있었다. 이 스풀 사건은 나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어느덧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학교친구 들 중 사진 서클에서 활동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별반 관심이 없었다. 그냥 간혹 가다가 건축물 사진이나 한두 번 찍어보았으나, 잡지책에 너무나도 잘 찍은 사진들이 나와주는데 나까지 찍으러 다닐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어느 순간 나는 라이카 CL로 사진을 찍어보기 시작했다. 아버지 몰래 가지고 나간 적도 있고, 또 아버지가 어느 정도 용납해 주셨다. 사진이 맑고 참 투명했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가격도 참 고가라는 것을 알았다. 그 정도가 라이카에 대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였다. 친구들 중에 니콘 FM등등 MX 같은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찍고, 학교 서클 룸 암실 가서 현상, 인화하고 많은 열정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나도 해외에 나갈 일이 생겼다. 정말 신났다. 게다가 경비행기를 탈 기회까지 생겼다. 아주아주 아름다운 해안가를 경비행기로 날아갈 때, 그때 나는 카메라를 손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열심히 찍어댔다. 조리개를 열고 셔터 스피드를 고속으로 놓고 참 많이 찍었다. (경비행기가 참으로 많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필름 되감다가 일이 벌어졌다. 스풀이 와장창 다 부러져버렸다. 이제는 필름을 걸 수조차 없게 되었다. 다 포기하고 같이 가져갔던 자동카메라로 여행의 추억을 담았다. 참 아쉬운 일이다. 그나마 경비행기 안에서 찍은 사진들은 노출이 조금 오버로 나왔지만 그때 내가 봤던 그 아름다운 해안을 잊어버리지 않게 사진으로 잘 보관되어있다.
중간중간 나는 참으로 열심히 라이카를 고치려 많이 알아보았다. 찾지 못해 다 포기하고, 우리 사무실에 가끔 필름 수거하러 오시는 충무로 사진 집 아저씨에게 카메라 고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 해도 투시도 작업을 손 투시도로 했었다. 지금은 무조건 CG다. 그래서 그 아저씨는 우리 사무실에 자주 들렸다. 개인이 찍은 사진 인화도 해 주셨지만 투시도를 사진으로 찍어서 슬라이드로 만들어 보관하는 작업을 담당하셨던 것이다. 부품을 구할 수 가 없어서 스풀을 황동으로 깎아서 끼워 주신단다. 아~ 그러면 다시는 부러지는 일이 없겠네 나는 참 신이 났다. 그래서 기다렸지만 그 아저씨는 너무 바쁘셨는지 한 6개월을 소식 없이 그냥 지나갔다. 그래서 나는 고치지도 못한 카메라를 돌려 받고, 또 장롱 속 깊숙이 골동품으로만 보관을 했다.
나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카메라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홈쇼핑으로 자동 케논 카메라를 샀다. 너무 많이 찍어 주어서 아직도 다 정리를 못했다. 아이가 둘씩이나 되니 카메라 필름 값이나 현상인화 그리고 앨범 값 등등 도대체 감당이 되질 않았다. 또한 어디 가서 사진이나 한번 찍을라 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담뱃갑만한 디카로 찍는데, 나는 아직도 징징거리는 필름자동 카메라로 아이들을 찍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2년 동안 디카를 사려 두리번거렸다. 잠자고 일어나면 새 제품이 나왔다. 화소수의 증가 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변화등등 도대체 어떤 것으로 살 것인지 너무나도 결정이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다가 파나소닉에서 라이카렌즈 사용하는 디카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래 이거야 나는 또 많은 고민을 하였다. 그러나 너무 고가였다. 결론적으로 최후의 디카 구입 대상은 LC-1이였다. 생긴 것도 참으로 라이카 답다. 그러나 주머니 사정상 살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자동카메라로 열심히 찍고 가끔 펜탁스MX로 찍었다. 그 후 도저히 견디지 못해 홈쇼핑으로 삼성 V10을 구입해 버렸다. 그 당시 독도 사건으로 일제는 죽어도 사기 싫었다. 하지만 필름 카메라의 그 부드러움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우연히 회사에서 인터넷을 하다 라이카 클럽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였다. 아직도 뒤통수를 누구한테 얻어 맞은 듯 멍하다. 그 후 난 라이카 클럽에 하루 종일 로그인 되어 있었다. 내 자신 내면 깊숙이 잠자고 있었던 사진에 대한 또 사진기에 대한 열정을 발견하고만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라이카 CL을 수리할 수가 있었다.
수리만하고 말았어야 하는데 사고를 단단히 쳤다. 디카하나도 2년 동안이나 못 사고 벌벌 떨던 내가 M3라는 기계에 빠진 것이다. 물론 내가 이사진기로 찍으면 잘나온다는 보장 절대 없다. 하지만 나는 꼭 한번 해보고 싶다.
또 그 파인더를 통해 보시던 아버지의 눈을 이제는 내가 느끼듯 훗날 M3는 우리 둘째, 아들놈한테 CL은 첫째, 딸아이한테 넘겨주려 한다. 내가 아버지께 CL을 물려받은 것처럼…
그 동안 내가 M3를 구입하기까지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던 정규택, 김승현, 김병인 선배님께 감사의 마을을 전한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이상제님의 댓글
이상제
감동적인 글입니다.
CL의 플라스틱 스풀은 잘 깨지기로 악명이 높죠.
금속재질로 깎아서 만들어 쓰는 분들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새로 구하신 M3와 함께 좋은 추억 담아내시길 바랍니다. ^^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소중한 기억들을 읽으면서.. 카메라와 관련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작은 팽이를 깎아주시던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너무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면서.. 우리들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장난감이었고,
잘깎은 팽이가 곧, 부러움의 대상이었기에..
거기.. 쇠구슬 하나 박으면 훨훨 날았었습니다. 음.. 추억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m3와 함께 자랄 아이들의 소중한 기억도 벌써 상상하게 됩니다.
최성식님의 댓글
최성식
읽다가 저까지 흐뭇해지는군요.
M3병 그거 한번 걸리면 M3 구해야 해결되는데, 해결되셔서 다행입니다.
좋은 사진 많이 찍으십시오.
다만, 이제 렌즈병이 남았습니다.
M3에는 뭐니뭐니해도 아이달린 6군8매랑 DR 아니겠습니까. 자자 어서 지르세요~~~^^
홍건영님의 댓글
홍건영
그 CL에 묻어있다는 지문과 부러진 스풀이 보고싶습니다
V10 아직 가지고 계시면 디카로 찍어서 사진 몇 장 올려주세요
김인택님의 댓글
김인택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옐로우 필터 주신다는 승진님 글 검색하다 이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님과 함께 사진을 할 수 있었던 승진님이 부럽군요
저는 20여년 전 리비아에서 일하고 돌아오는길에 아부다비 공항에서 산
펜탁스 p50 이 처음 갖게된 카메라였습니다
20여년 잘 써왔고 지금도 작동 잘되고, 이젠 보관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사갖고 온 그 이듬해에 펜탁스에서 그모델 선전을 하더군요 (카메라인가? 컴퓨터인가?) 이렇게 선전을 했지요~~
바르낙만으로도 내겐 과분한데 m3를 넘보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그날 이영욱님 덕분에 귀한 m바디와 렌즈 구경 실컷했습니다
사진생활 즐겁게 하시고,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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