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와바라 시세이 : 다시 보는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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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이태영
- 작성일 : 03-09-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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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구와바라 시세이 ..
내가 투숙하고 있던 그랜드호텔에서 걸어서 청계천까지는 600미터 정도였던 것 같다. 로면 전차가 달리는 태평로를 걸어서 동아일보의 빌딩까지 가면 거기에 청계천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그랜드 호텔을 잘 모를 것이다. 1960년대에 남대문을 바라보면 남대문로에서 광화문을 향하는 일방의 기점의 위치에 그랜드 호텔이 있었다. 그 후 호텔은 폐업되고 동성빌딩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청계천의 도로는 태평로와는 다르게 남대문로를 통해서 명동이나 수하동을 거쳐 청계2가의 방향으로 걸어갔었다. 그 시대에는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지 않을 때여서탈수 있었던 교통수단은 택시나 합승이라고 부르는 군용트럭을 개조한 소형버스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청계천의 명칭은 문자로 알 수 있듯이 아름다운 추억의 이조시대의 잔형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1960년대의 청계천은 한마디로 오염된 악취의 하수도였다 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변에는 목조 가옥이 3층 건물로 그것은 마치 하꼬방의 가옥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나는 전년도 1964년 7월부터 한국을 취재하기 시작했는데 그 해에는 청계천의 사진은 찍지 않았었다.청계 고가도로의 건설공사가 착공된 것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1960년대의 초라고 생각된다. 청계천을 복개하게 위해 콘크리트의 교각이 세워질 때쯤이었다. 청계천의 명칭처럼 아름답게 흐르는 청류의 천은 콘크리트의 교각이 세워져 별로 좋지 않은 풍경으로 나의 눈에 비쳐졌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과 근대화을 상징하는 멋있는 개발의 빛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청계천변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일까?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한국동란의 쯤부터 라고 생각되어진다. 북한에서 전란을 겪고 남쪽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청계천은 일본의 식민지시대부터 해방되어 국토의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계속해서 민족의 가혹한 역사를 보는 살아있는 드라마의 비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나는 청계천변에 촬영은 하루종일 찍은 것은 아니며, 나의 촬영의 범위도 청계천의 전역이 아니고 태평로에서 동대문까지의 약 2킬로미터로 아침과 저녁에 방문하였다. 그것은 아침과 저녁에는 청계천 변의 사람들과의 생활의 표정이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낮에는 일터로 나가기 때문에 3층의 목조가옥의 창으로부터 사람들의 얼굴을 잘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는 어린이들이 길에서 놀기도 하였고, 청계천의 생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 후 3년이 지나고, 1968년에 베트남전쟁을 취재하고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그때 다시 청계천에 갔었다. 성동구의 마장동의 방향에 고가도로의 교각이 많이 건설 된 것을 볼 수 있었다. 1971년에 약 6킬로미터의 고가도로가 개통했지만, 나는 그 후에 촬영을 하지 않았다.??1965년은 한국이 큰 격동적인 1년이었다. 한, 일 국교수복의 움직임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민의 데모로 수도의 서울은 마치 시가전의 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군의 월남전쟁의 파병 등 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은 현실을 나의 카메라로 목격 할수 있었다. 1960년대의 후반의 짧은 기간 이였지만, 물이 흐르는 청계천의 원풍경을 세세하게 기록, 촬영해 왔다.그 때부터 38년간 청계천의 사진은 나의 사진전, 사진집에서 조금씩은 발표했지만,??이번처럼 미 발표작을 청계천이란 제목으로 전시한 적은 없었다. 지금 서울시의 결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청계천의 복원은 아마도 훌륭한 대사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사를 기회로 내가 촬영한 38년 전의 사진이 주목받는 일이 되었다. 한국 경제의 고도 성장과 근대화의 역사를 가늠할수 있는 모습을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김영섭 사진화랑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게 되어서 프로사진가로서 영광으로 생각磯? 3년 후의 2005년9월에 청계천은 살아있는 모습으로 화려하게 새롭게 태어날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부터 다시 청계천 걷는 일을 기대해 본다 나는 그 때 청계천과 재회하고 싶다. 청계천의 유역에 살고 있었던 수 천명으로 생각되는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이사해서 살고 있는 것일까?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
글, 김영섭(김영섭사진화랑대표)
청계천 복원 공사가 7월1일 시작되어2005년 9월 완공을 목표로 대 공사에 들어갔다. 김영섭 사진화랑은 일본 보도사진계의 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구와바라 시세이의 38년 전에 찍은 청계천 사진 전시회를 초대하여 개최하게 되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방면에 걸쳐서 격동의 반세기를 한국사진 찍는데 투자 하였다. 1964년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태양잡지사의 한국취재를 하기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60년대 도시, 농촌 어촌 등 다양한 사진을 찍었다. 그때는 한국 사진이 일본에 거의 소개 된 적이 없었다. 그 후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동두천 양공주, 한일수교 반대 데모, 월남전, 팀스피리트 00등 한국의 역사적 사건에는 항상 구와바라 시세이가 있었다. 한국인이 아니면서 그가 애착을 갖고 한국을 취재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등으로??일본에 대한반일 감정, 해방 후의 분단, 한국전쟁, 한일수고 반대등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아 있었고, 보도사진가인 구와바라 시세이에게 있어서 한국은 가장 치열한 이데올로기의 대치 상태의 국가였고, 과거 식민지 지배를 통해서 일본과의 관계가 있는 나라이므로 일본인인 구와바라로서는 촬영 장소로서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번에 전시될 청계천은 단순히 청계천을 찍은 것은 아니다. 구와바라 시세이는 만약 청계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 지방에서 모여들어 한 집단을 이루어 청계천에서 살고 있었다면 찍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청계천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 전쟁때 남한으로 피난 와서 마땅히 정착할 곳이 없는 실락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모여들어 하나의 집촌을 형성하여 살고 있었으므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청계천은 이제 복원된다. 38년 전으로 되돌아가 그때의 생생한 청계천 사진을 구와바라 시세이를 통해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기성세대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추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며, 젊은이들은 과거의 청계천을 볼 수 있어서 새로울 것이라 생각된다. 사진은 바로 이런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38년전으로 다 함께 되돌아 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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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한국이었나? 읽은지가 하도 오래되어 제대로 기억이 나지도 않는 제목의 사진,산문집이다. 그리고 얼마전 보도사진가라는 제목의 수필또한 읽었었다. 그렇게 구와바라 시세이에 대해 관심을 다시 가지던 찰나 인사동의 김영섭사진화랑 ( http://gallerykim.com ) 에 구와바라 시세이의 다시보는 청계천 이란 제목의 사진전이 열러 들러보았다. 아마도 청계천 복원공사가 진행되며 기획된 시의적절한 전시라 생각이 들었다. 전시실은 소박하고 아담하였다. 이전에 한참 미술에 흠뻑 빠져있을때만해도 나중에 여유가 생길 나이가 되면 조그마한 화랑을 하나 오픈해야지 하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는데 이정도면 적당하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진들은 참 조용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무언가를 고발해보려는 어깨에 힘이들어간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시대를 기록한다라는 사명감도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내부로 억지로 들어가보려는 그런 안간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관조하며 찍어내는 그들의 단면. 나와 정말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 느껴져서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사실 난 개인적 성향때문에 나 아닌 다른 타인의 삶의 안쪽으로 밀착해 들어가지 못한다. 물론 용기부족이라고 탓할수도 있지만, 물론 일정부분 그런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난 원래 평면적인 삶의 알레고리 그 자체를 좋아하지 하나의 개개 사건사고들의 이벤트를 좋아하진 않는다. 무심히 담아낸 사람들의 모습의 머리위를 지배하는 정서들을 담아내고 싶지, 그들의 삶의 역동성과 무게감이 선사하는 진한 페이소스를 담아내는데는 큰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난 그가 약간의 경쟁의식을 느끼며 언급한 유진스미스의 미나마따병 사진보다도, 훗날 사진속 주인공이 성장하여 20세의 생일날이었던가? 촬영하였던 그 미나마따병 사진이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런 정적인 아름다움은 동양인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가능한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어찌 되었건 흉물스럽게 박혀있는 청계고가의 기둥뿌리를 사이의 풍경들. 그리고 그 사이로 펼쳐지는 하꼬방같은 다락. 그리고 그 위의 사람들. 이런 모습들은 참으로 담담하면서도 아련한 감동을 나에게 주었다. 사진의 개수가 훨씬 더 많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만한 좋은 사진들이었다. 어느 시대 어느 하늘 아래에도 여전히 도시가 있고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 그리고 그들을 짓누르는 공기의 무게 또한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다를것은 하나 없다. 물론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기층일 뿐이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좋은 전시를 보아 참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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