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Leica best snap photographer.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유재욱
- 작성일 : 10-09-05 18:36
관련링크
본문
특히, 요즘같이 필름가격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는, 허긴, 필름가격은 과거에도 생활 물가에 또, 경제 여건에서는 마찬가지 일런지 모르겠지만.
과거 선배님들은 라이카를 주로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니콘이 등장하고 나서도 신문사에서는 라이카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니콘을 믿지 못하였다는 선배들의 얘기가 기억납니다.
"인간"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던 부산의 최민식선생님은 기억으론 70년대 말까지 라이카를 사용하였습니다.
더블 스트록에 비소프렉스장착하고서도 네댓시간 자갈치시장 훝고나면 보통 네,뎃롤.
겨울철 낮시간이 짧은 날에도 보통 하루에 7,8롤을 소모시킵니다.
그것도 피사체를 따라 뛰어 가면서 그야말로 신들린 사람같았습니다.
사진집이 아마도 8집까지 출판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얼마나 사용하였으면 부속이 다 딿아 더 이상 수리가 불가할 정도로 사용 한 것이 몇대.
실제로 우리나라 사진작가 중에 작품사진으로 안기부에서 고초 당한 사람은 아마 최 민식선생이 유일하지 않을까?
수감 중의 최 민식선생을 독일정부가 탄원하여 나오게 되고 독일 초청 사진전을 열게 되고..많은 일화가 있지요.
라이카 속사 스냅하면 최민식선생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최 민식선생님은 부산 분이고,
다음의 김 일창선생님은 대구 분으로 우리 나라에서 국제전에 이분 보다 많이 입상한 작가는 없지 않을까 확신합니다.
아마도 세계 사진 작가에서도 김 일창선생님 만큼 국제전에 부지런히 출품하고 많은 입상 성적에서도 아마 기네스기록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김 일창선생님 역시 70년도 말까지 라이카가 주포였으며 하루 출사에 보통 열롤을 준비하면 거의 다 소모시켰습니다.
두분 서로가 국제전에 발표한 사진으로 서로를 잘 알고 계시는 관계이시고 속사에서는
서로가 대단하다고 혀를 내두른 장면을 많이 목격하였습니다.
두분의 작품 주제와 성향은 바삐 살아가는 서민 생활이었으며 작품활동은 최민식선생님은 자갈치시장이었고 김 일창선생님은 주로 5일장에서 하였습니다.
김 일창선생님도 라이카를 몇대 망쳤습니다.
80년대 들어 라이카 기계값이 만만치 않고 200mm장 촛점 렌즈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니콘으로 전향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주포는 라이카였습니다.
옆에서 보면 핀트도 맞추지 않는 것 처럼 보일 정도였으며 핀트는 요즘 우리들이 운전하면서 핸들 꺽는 것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손바닥은 하늘을 향하게 하여 손바닥으로 렌즈를 받치면서 손가락은 헤리코이드를 돌리는 단순 동작 그리고 카메라는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턱과 목 근처에 항상 위치하여 언제라도 눈에 들어오면 잡아 챌 준비를 항상 하고 있어야 가능하니다.
구도와 화각을 잡으면서 즉, 몸이 움직이면서 핀트를 맞추고 피사체의 변화에 따라 바로 연사로 이어 지지요.
언급한 두 분, 필름 가는 모습 보면 완전 꼬리 내려야 합니다.
통상 같은 기종을 두대 준비하여 연사시에느 보디만 바꾸고 여유가 날 때 필름을 갈지요.
부산 모임에 최 민식선생님을 초청하여 스냅 강의를 청하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듭니다.
라클 오프라인에서도 도시 근교의 5일장이나 수산시장 등등에서도 스냅 촬영을 제안합니다.
육체 노동자, 시장 상인 찍는다고 남대문에서 사진 찍는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상대가 싫어하고 큰소리 치면 손 한번 흔들고 고개 한번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면 됩니다.
어제 들린 절에서 큰 행사를 마침 하고 있어 스냅의 수준은 아니지만 카메라 들이 대니 어느 스님 고만 찍어라고 하시길래 딱 한번만, 딱 한장만 손가락으로 사정하고 두손으로 합장하여 절을 꾸벅하니 한 장만 찍어라고 고개를 꺼뜩하면서 승낙을 받았지요.
어디 한장만 찍습니까,
챤스지요.
움직이는 피사체는 아니지만 찍기 힘든 대상이지만 김 흥국씨 말대로 대 미세요.
어디 머리통 깨 지겠습니까, 깨 지면 된장 바르면 됩니다.
댓글목록
김_민수님의 댓글
김_민수
첫 번째 사진에 기타치시는 분은 왠지 인사동에서 봤던 분같기도 합니다.
최민식 선생님께서 라이카를 많이 사용하셨는지는 몰랐습니다.^^
결혼하시자마자 미술을 공부하기위해 일본으로가는 밀항선을 타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카메라를 처음 접하고, 모은 돈으로 카메라를 사서
사진을 찍기 시작하셨다구요...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사진을 업으로 정하고 치열하게 활동하셨지만,
아마추어인 제게도 영감을 주신 분이죠.
유재욱님의 댓글
유재욱
제 아무리 단단한 라이카라도 더블 스토록 셔터를 요즘 모터드라이브 정도의 속사를 하셨으니
아마 부속들 열 났을 거예요.
당연 기름도 마르고 부속은 닳고,,,
사진은 무엇이고, 무엇을 표현하고 등등 사진을 확실히 말해 주는 작가이시죠.
신계호님의 댓글
신계호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분들의 이야기로군요.
박성준75님의 댓글
박성준75
좋은 글과 정보 감사드립니다.
스크랩해가고 싶은 부분이 있군요. ^^
우동균님의 댓글
우동균국내의 라이카를 사용하시는 사진작가들을 알고 싶었는데,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재욱님의 댓글
유재욱
원 작성회원 : 우동균 R2A
국내의 라이카를 사용하시는 사진작가들을 알고 싶었는데, 좋은 글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5,60년도에 활동하셨던 많은 선배들은 거의 라이카만 사용하였다 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임 응식선생님은 천천히 천천히.
작품 활동보다 기자로써 카메라를 더 많이 사용한 분으론 " 이 명동선생님"이시죠.
동아 일보 사진부장, 70년도엔 동아 콘테스트, 살롱이 당시 국전보다 더 어렵다 하였지요.
국전은 물이 흐렸지만 동아는 류도 다르고.
이분은 기자 였기에 속사가 당연하다 하겠지만 한때 게리쿠퍼와 내기한 적이 있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검색해 보니 90이시네요.
핫셀 속사는 이 봉하(전 사협 이사장님), 이분은 핫셀을 35mm와 같은 속도로 ..
(필름은 장전은???? 동반한 운전 기사가 연방 갈아 주었죠. 그러니 가능하지요.)
70년도초, 이제는 밝혀도 공소시효가 지났으니 괜찮겠죠.
누설하자면, 큰 가십꺼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한 열정으로 받아 들이자면.
요즘 기준으로 보면 공무원 근무 태만감에 상부에서 알면 목아지.
동대무 경찰서 수사과장 시절에 집무실에 암실 장만하여 그것도 전지(20 X24) 작업을
집무실에서 하였다는 사실.: 집무실 = 암실. 바닥엔 대형 바트가 나란히....
대뽀가 커서(?) 라이카같은 작은 장남감이 싫다는 분.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이메일주소 무단수집을 거부합니다.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