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 롤랑 바르트. 동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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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승현
- 작성일 : 13-12-28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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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신서 326/ 김웅권 옮김/ 원저 1980년 (번역 2006년)
안녕하세요? 바르트의 <밝은 방>을 소개합니다. 수년간 씨름했지만
이제 좀 이해가되는것 같아서 소개하려고합니다. 보통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발터 밴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를 사진에 관한 중요한 두권의 책이라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진 이야기할때 흔히 사용되는 "스투디움"과 "푼쿠툼"이란 개념이
소개되고있습니다. 그리고 <밝은방>이란 사진의 어둠상자가 발명되기전에 카메라보다
앞선 장치인 <카메라 루시다:한쪽눈으로는 사물, 한쪽눈으로는 종이에 고정하여
프리즘을 따라 사진을 만듬>를 뜻하기도합니다. 실재로 우리나라에서 이책은 <카메라
루시다>로 이미 번역되기도하였습니다. <밝은 방>과 <카메라 루시다>는 같은 내용이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살아가다보면 보편적으로 혹은 자기에게만 어려운 일이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저작들은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의 <신화론>은 그런대로 읽을만했습니다.
그러나 <카메라 루시다>는 힘들었고, <밝은 방도> 읽다가 몇번이나 밀쳐두었다가 또 읽어보고...
수년이 지나서 어느날 밤에 좀 읽히기 시작하더군요. 이런 현상은 저의 특수성이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이론가들의 책이 좀 난삽합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지,
그들의 국민성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사고와 표현 스타일때문일수도....
이 책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책에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 (Ontological assumption: 존재론적 가정)에
닥아가려고합니다. 그전에 자기에게 사진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준 책은 없었다고
생각하는것같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무엇인가?에대하여 자기자신을 척도로 삼으려합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란 말을하는 것처럼, 바르트는 자기의 사진에 대한 생각을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척도로 삼으려합니다. 아주 새로이 시작하려합니다. '사진은 무엇인가?'
이질문은 '사진을 어떻게하면 잘찍는가?'란 질문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사진을 시작하면서 사진은 무엇인가보다는 어떻게하면 사진을
잘 찍을수 있을까?에 몰두해왔습니다. 물론 사진은 무엇일까?란 질문과 어떻게 사진을 잘찍을까?
질문이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겠습니다.
사과가 무엇인가? 어떻게 구성되어있고,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가 알게되면
사과 먹는 방법도 좀더 쉽게 알게될것 같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바르트의 <밝은 방>은 사진은 "무엇" 인가를 알아보는 책이랍니다.
<밝은 방>은 I, II편으로 되어있습니다. I 의 끝부분에가면,
나는 아직도 사진의 본질 (eidos - 현상학적 개념입니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되어있습니다.
힘이 좀 빠집니다. 스투디움이니, 푼쿠툼이니....이런 개념들을 설명해놓고
아직도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런것을 II 에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도 가끔 느끼는 바지만, 사진이 무엇일까? 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진 그 자체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있는지 알고 싶었다고합니다.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알고나면 더 사진을 잘 찍을까요? 그럴것 같기도하고,
둘 사이는 무관할것 같기도합니다. 참고로 영화감독들과 이야기해보면
영화 감독들은 영화의 본질적 특성을 잘 알고있는 것같았습니다.
우리 라클은 프로수준의 아마추어 클럽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바르트는 사진이 무엇인가 알기위해서 분류를 해보려고합니다.
분류란 연구자들이 최초로 초보단계로 무엇을 알기위해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바르트는 사진은 분류 불가능하다고합니다. 사진은 분류하려고하면 달아나버린다고합니다.
사진은 무질서하기때문에 분류가 불가능하며, 결국 사진은 '보세요' '봐' '여기있다'가
교대되는 노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바르트는 자기 스스로가 사진을 아는 척도가되어 사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분석 대상은 자기 어머니의 어릴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결국 사진의 본질로가는
아리아드네이며, 모든 사진이 고유하게 갖고있는 미로를 따라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인
사랑과 죽음등의 근원적 느낌에 도달하게된다.)
사진은 촬영자와 구경꾼, 그리고 유령(*찍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스스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는 감동을 경험한적이 없기에....촬영자에 대한 탐구는
사진의 본질 탐구에서 제외합니다. 따라서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는
두가지경험에 의지하여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려합니다. 즉 바라봄의
대상이되는자(*피사체)의 경험, 바라보는자(*사진 감상자)의 경험뿐입니다.
사진찍는자의 경험이 사진의 본질에서 제외되었다 는것은 충격적입니다.
아마도 바르트의 생각에 사진찍는자의 경험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How?)찍을까에 분류된다고 보는것같습니다.
그것은 사진의 본질 (what?)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진 찍히는자로서 느낌은 사진의 본질을 알게해 줄수 있을까?
구경꾼으로서의 경험은 사진의 본질을 알게해 줄수 있을까?
바르트는 동일한 사진작가의 모든 사진들을 다 좋아해본적이없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진의 본질이 사진작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예술가들의 스타일이라 부르는 그 편리한 개념에 다다를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 저생각 끝에 바르트는 하나의 사진에서 사진의 본질에
근접하는 개념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모험"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진은 사건처럼 닥치고 어떤 사진은 그렇지않다.
...음울한 사막에서 갑자기 어떤 사진이 나에게 다다른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그것을 존재케하는 그 매력을 이런 식으로,
즉 생기 불어넣기로 명명해야한다. 사진자체는 전혀 생기가있는 게 아니지만,
그것은 나에세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모든 모험이 수행하는것이다.
이런 생기를 넣어주는 즉 모험이라부를수 있는 이것이 사진의 본질이 아닐까?
바르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간다.
모험의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가 프랑스말에는 없었기때문에,
바르트는 라틴어의 "스투디움"과 "푼쿠틈"을 가져온다.
따라서 사진의 본질은 스투디움과 푼쿠틈이란 두개 단어로 압축됩니다.
스투디움은 직접적으로는 '연구'를 의미하지않고 어떤것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애정, 열정적이지만 특별히 격열하지않은 일반적인 정신집중을 의미한다.
두번째 푼쿠틈은 스투디움을 깨트리려온다. 이번에는 그것을 찾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것이 장면으로부터 화살처럼 나와 나를 관통한다.
푼쿠툼은 찔린 자국이며,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며, 작게 베인 상처이며
- 또 주사위 던지기이기떄문이다.
"사진의 품쿠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뿐만아니라 나에세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 사진의 두테마를 구분하여, 바르트는 계속적인 관심을 가질수있었다고한다.
스투디움은 예의상 관심이며,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며, 자각의 의도와 숙명적으로
만나는것이며, 그 의도와 일치하는것이다. 스투디움은 일종의 교육(지시과 예절)이다.
어떤 풍경이 나의 흥미를 끌면 스투디움이지만, 그 풍경의 어떤 요소가 나를 찌르면 푼쿠툼이다.
이제 바르트가 말한 푼쿠툼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진속에서 어떤 요소가 남들이 머라하던
자기에세 화살처럼 닥아와서 진한 감동을 남기는...현장의 모험감을 느끼는....
그것때문에 그 사진을 자꾸 쳐다보게되는....
그래서 사진속에는 스투디움과 푼쿠툼이 공존한다.
푼쿠툼의 예를 제시한 사진은 이글 밑에 첨부하였습니다.
책 II부의 내용이 사진의 본질을 향해가면서
핵심적인 결론은 사진은 "자 그것(사람)은 여기 존재해있었다"라는 확실성과
"바로 이것이야!(바르트는 불교에 관심이많습니다)."라는 깨달음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진의 차이, 사진과 시간성(역사)등의 이야기는
우리가 읽으면서 각자 느껴야할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새해에 좋은 나날 되시길.....#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푼쿠툼의 예>
안녕하세요? 바르트의 <밝은 방>을 소개합니다. 수년간 씨름했지만
이제 좀 이해가되는것 같아서 소개하려고합니다. 보통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
발터 밴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를 사진에 관한 중요한 두권의 책이라합니다.
이 책에서는 사진 이야기할때 흔히 사용되는 "스투디움"과 "푼쿠툼"이란 개념이
소개되고있습니다. 그리고 <밝은방>이란 사진의 어둠상자가 발명되기전에 카메라보다
앞선 장치인 <카메라 루시다:한쪽눈으로는 사물, 한쪽눈으로는 종이에 고정하여
프리즘을 따라 사진을 만듬>를 뜻하기도합니다. 실재로 우리나라에서 이책은 <카메라
루시다>로 이미 번역되기도하였습니다. <밝은 방>과 <카메라 루시다>는 같은 내용이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살아가다보면 보편적으로 혹은 자기에게만 어려운 일이있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저작들은 읽기가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그의 <신화론>은 그런대로 읽을만했습니다.
그러나 <카메라 루시다>는 힘들었고, <밝은 방도> 읽다가 몇번이나 밀쳐두었다가 또 읽어보고...
수년이 지나서 어느날 밤에 좀 읽히기 시작하더군요. 이런 현상은 저의 특수성이겠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프랑스 이론가들의 책이 좀 난삽합니다.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지,
그들의 국민성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사고와 표현 스타일때문일수도....
이 책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책에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 (Ontological assumption: 존재론적 가정)에
닥아가려고합니다. 그전에 자기에게 사진의 본질을 정확히 알려준 책은 없었다고
생각하는것같습니다. 그래서 사진은 무엇인가?에대하여 자기자신을 척도로 삼으려합니다.
우리가 흔히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란 말을하는 것처럼, 바르트는 자기의 사진에 대한 생각을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척도로 삼으려합니다. 아주 새로이 시작하려합니다. '사진은 무엇인가?'
이질문은 '사진을 어떻게하면 잘찍는가?'란 질문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사진을 시작하면서 사진은 무엇인가보다는 어떻게하면 사진을
잘 찍을수 있을까?에 몰두해왔습니다. 물론 사진은 무엇일까?란 질문과 어떻게 사진을 잘찍을까?
질문이 완전히 별개의 것은 아니겠습니다.
사과가 무엇인가? 어떻게 구성되어있고, 그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가 알게되면
사과 먹는 방법도 좀더 쉽게 알게될것 같습니다. 제 생각입니다.
아무튼 바르트의 <밝은 방>은 사진은 "무엇" 인가를 알아보는 책이랍니다.
<밝은 방>은 I, II편으로 되어있습니다. I 의 끝부분에가면,
나는 아직도 사진의 본질 (eidos - 현상학적 개념입니다)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되어있습니다.
힘이 좀 빠집니다. 스투디움이니, 푼쿠툼이니....이런 개념들을 설명해놓고
아직도 사진이란 무엇인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런것을 II 에서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시작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도 가끔 느끼는 바지만, 사진이 무엇일까? 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사진 그 자체가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본질적 특성을 가지고있는지 알고 싶었다고합니다.
사진의 본질적 특성을 알고나면 더 사진을 잘 찍을까요? 그럴것 같기도하고,
둘 사이는 무관할것 같기도합니다. 참고로 영화감독들과 이야기해보면
영화 감독들은 영화의 본질적 특성을 잘 알고있는 것같았습니다.
우리 라클은 프로수준의 아마추어 클럽입니다. 그렇다면.
우선 바르트는 사진이 무엇인가 알기위해서 분류를 해보려고합니다.
분류란 연구자들이 최초로 초보단계로 무엇을 알기위해서 시작하는 것이니까요.
바르트는 사진은 분류 불가능하다고합니다. 사진은 분류하려고하면 달아나버린다고합니다.
사진은 무질서하기때문에 분류가 불가능하며, 결국 사진은 '보세요' '봐' '여기있다'가
교대되는 노래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제 바르트는 자기 스스로가 사진을 아는 척도가되어 사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분석 대상은 자기 어머니의 어릴때 온실에서 찍은 사진= 이 사진은 결국 사진의 본질로가는
아리아드네이며, 모든 사진이 고유하게 갖고있는 미로를 따라서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인
사랑과 죽음등의 근원적 느낌에 도달하게된다.)
사진은 촬영자와 구경꾼, 그리고 유령(*찍히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스스로가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는 감동을 경험한적이 없기에....촬영자에 대한 탐구는
사진의 본질 탐구에서 제외합니다. 따라서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는
두가지경험에 의지하여 사진의 본질을 탐구하려합니다. 즉 바라봄의
대상이되는자(*피사체)의 경험, 바라보는자(*사진 감상자)의 경험뿐입니다.
사진찍는자의 경험이 사진의 본질에서 제외되었다 는것은 충격적입니다.
아마도 바르트의 생각에 사진찍는자의 경험은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How?)찍을까에 분류된다고 보는것같습니다.
그것은 사진의 본질 (what?)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진 찍히는자로서 느낌은 사진의 본질을 알게해 줄수 있을까?
구경꾼으로서의 경험은 사진의 본질을 알게해 줄수 있을까?
바르트는 동일한 사진작가의 모든 사진들을 다 좋아해본적이없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사진의 본질이 사진작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닐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바르트는 예술가들의 스타일이라 부르는 그 편리한 개념에 다다를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 생각 저생각 끝에 바르트는 하나의 사진에서 사진의 본질에
근접하는 개념을 찾아냅니다. 그것은 "모험"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진은 사건처럼 닥치고 어떤 사진은 그렇지않다.
...음울한 사막에서 갑자기 어떤 사진이 나에게 다다른다. 그것은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따라서 그것을 존재케하는 그 매력을 이런 식으로,
즉 생기 불어넣기로 명명해야한다. 사진자체는 전혀 생기가있는 게 아니지만,
그것은 나에세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것이 모든 모험이 수행하는것이다.
이런 생기를 넣어주는 즉 모험이라부를수 있는 이것이 사진의 본질이 아닐까?
바르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나아간다.
모험의 감정을 설명하는 단어가 프랑스말에는 없었기때문에,
바르트는 라틴어의 "스투디움"과 "푼쿠틈"을 가져온다.
따라서 사진의 본질은 스투디움과 푼쿠틈이란 두개 단어로 압축됩니다.
스투디움은 직접적으로는 '연구'를 의미하지않고 어떤것에 대한 전념,
누군가에 대한 애정, 열정적이지만 특별히 격열하지않은 일반적인 정신집중을 의미한다.
두번째 푼쿠틈은 스투디움을 깨트리려온다. 이번에는 그것을 찾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것이 장면으로부터 화살처럼 나와 나를 관통한다.
푼쿠툼은 찔린 자국이며, 작은 구멍이며, 조그만 얼룩이며, 작게 베인 상처이며
- 또 주사위 던지기이기떄문이다.
"사진의 품쿠툼은 사진 안에서 나를 찌르는 (뿐만아니라 나에세 상처를 주고 완력을 쓰는)
그 우연이다. 사진의 두테마를 구분하여, 바르트는 계속적인 관심을 가질수있었다고한다.
스투디움은 예의상 관심이며,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며, 자각의 의도와 숙명적으로
만나는것이며, 그 의도와 일치하는것이다. 스투디움은 일종의 교육(지시과 예절)이다.
어떤 풍경이 나의 흥미를 끌면 스투디움이지만, 그 풍경의 어떤 요소가 나를 찌르면 푼쿠툼이다.
이제 바르트가 말한 푼쿠툼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사진속에서 어떤 요소가 남들이 머라하던
자기에세 화살처럼 닥아와서 진한 감동을 남기는...현장의 모험감을 느끼는....
그것때문에 그 사진을 자꾸 쳐다보게되는....
그래서 사진속에는 스투디움과 푼쿠툼이 공존한다.
푼쿠툼의 예를 제시한 사진은 이글 밑에 첨부하였습니다.
책 II부의 내용이 사진의 본질을 향해가면서
핵심적인 결론은 사진은 "자 그것(사람)은 여기 존재해있었다"라는 확실성과
"바로 이것이야!(바르트는 불교에 관심이많습니다)."라는 깨달음같은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영화와 사진의 차이, 사진과 시간성(역사)등의 이야기는
우리가 읽으면서 각자 느껴야할 내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새해에 좋은 나날 되시길.....#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푼쿠툼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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