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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진가 13. - 로버트 프랭크 -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도웅회
  • 작성일 : 02-05-13 16:25

본문

▽ No, 229
▽ 이름:도웅회 (redelmar@hanmail.net)
▽ 분류:기타
▽ 2002/2/20(수) 21:23 (MSIE5.5,Windows98,Win9x4.90) 211.234.192.92 1152x864
▽ 조회:519

위대한 사진가 13. - 로버트 프랭크 -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

영상언어로서의 사유화시기


로버트 프랭크는 195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영상사진의 길을 먼저 연 대표적인 사진가이다. 영상사진의 새시대는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20세기 후반기의 현대사진은 그를 접어두고는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사진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현대사진은 프랭크를 중심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크게 시대적 구분이 되기도 한다.

프랭크는 1924년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 때부터 사진을 시작하였다. 처음 상업사진가의 조수로 들어갔던 그는 얼마후 쮜리히의 영화사에서 스틸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후 본격적인 활동의 장을 찾아서 파리로 갔다가 사진가로서 새로운 발돋움을 위해 47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하퍼스 바자'지의 패션사진 일을 맡아 뉴욕에 터전을 마련한 다음, 48년 페루와 볼리비아 촬영여행을 하였다. 1949년부터 51년까지 3년 동안은 유럽쪽으로 방향을 돌려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였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프리랜서로 활약했으며 때때로 '뉴욕 타임즈'지의 광고사진도 찍었다. 1953년에는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전후 유럽 사진가전'을 준비하기 위해 에드워드 스타이켄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사진작품들을 수집하는 데 한몫을 거들었다.

1955년에는 구겐하임 재단의 기금을 받아 56년까지 1년 남짓 전미국을 두루 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1958년 프랭크는 이것을 '아머리카인들(The Americans)'는 이름의 사진집으로 묶어서 세상에 펴냈다.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벌어졌다. 까르띠에-브레쏭은 이 사진집을 보고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충격"이라고 했고, 워커 에반스는 58년도 '유에스 사진연감'에서 최대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영국의 빌 브란트도 이를 높이 평가하고 나섰다. 한 시대를 변혁하는 역사적인 업적에는 으례 찬성과 반대의 의견대립이 따르기 마련이듯이 한편에서는 그의 사진집이 미국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극단적인 왜곡이며 편견이라는 의견들도 분분하였다. 사진집 '아메리카인들'은 사진 표현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그 전 시대와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프랭크는 이 사진집을 낸 58년부터는 영화에 관심이 쏠려 사진에서 멀어졌다가 70년대에 다시 사진계로 되돌아왔다. 72년 이제까지의 작가생활을 통틀어 마무리짓는 의미에서 자서전적인 사진집 '나의 손금(The Lines of My Hand)'를 냈고, 76년 다시 사진들을 추리고 보충해서 사진집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를 출판했다. 그러나 사진계로 돌아와 그가 보여준 일련의 일들은 지나온 과거의 업적을 마무리하는데 의미가 있을 뿐, 그 이후의 다른 진전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결국 프랭크의 사진세계는 사진집 '아메리카인들'에 전체적인 핵심이 집약되는 것이다. 이 사진집은 파리의 로베르 데르삐르 서점에서 먼저 출판을 했고, 이듬해 미국에서 영어판으로 발행되었다. 책은 보통 크기보다 조금 작고, 편집은 한쪽에 사진을 넣고 맞은편에는 글을 실어서 사진과 함께 보고 읽도록 하였다. 글은 주로 알랭 보스케가 책임을 맡아 시몬느 드 보브와르, 어스킨 콜드웰, 에이브 링컨, 앙드레 모로아, 존 스타인벡, 헨리 밀러의 글들을 발췌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의 미국 및 미국인에 관한 글이나 여러가지 설문조사 및 통계까지 폭넓게 실음으로써 영상언어와 문자언어가 함께 동원된 미국인론(美國人論)으로 편집하였다. 이러한 편집의도에 비추어 사진의 경향은 자연히 에세이적인 성격을 띤 종합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짐작하게 된다.

프랭크의 사진집 '아메리카인들'은 현대사진의 고전이며, 사진사의 새로운 분수령이라는 역사적인 평가가 내려진 기념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사진집을 통해서 나타난 그의 사진세계는, 주체로서의 사진가 자신의 의식과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행위가 재래적인 기록의 수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탈바꿈은 그 자신의 독특한 개성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의식의 사진적인 자각현상인 것이다. 그의 사진세계가 이룬 변신이 한 시대를 대표하게 된 근본적인 요인은 무엇보다도 대표적인 의식의 변혁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그이 의식구조는 전통적인 합리주의의 궤도를 벗어난 자의식의 갈등과 괴리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복합적인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시대 이래로 지속되어 온 사고방식 즉 자아를 원점으로 논리적 체계 안에서 세계를 내다보는 합리주의의 절대적인 신앙이 20세기에 들어와 허물어지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즉 대상을 인식하는데 있어서 원근법의 고정된 시점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의 사진에 깔린 의식구조는 자아를 기점으로 하는 원근법적인 인식의 논리를 벗어난 복합적인 성질을 드러내 보인다. 자아와 대상과의 대응관계가 논리적인 인과법칙으로 명쾌하게 보편적인 개념을 추출해낼 수 없는 복합적이고 심층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이것이 바로 현대적인 의식의 커다란 특징이다).

프랭크의 내면적인 특성은 현대문명이 몰고온 인간의 소외와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시대적 상황에 직면하여 자아와 대상과의 인식체계가 굴절되거나 단절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이같은 부조리 현상은 과잉된 자의식으로 말미암아 정신적인 방황과 우울한 자폐증을 드러낸다. 프랭크의 사진에 나타나는 이같은 의식상의 특징은 근대적인 이분법의 명쾌하고도 정확한 논리적 인식체계와는 완연히 다른 것이다. 이러한 의식상의 차이가 사진에 있어서 표현상의 커다란 차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제의 접근방식과 사진적인 표현양식의 특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의 사진이 어느 부류에 속하는 것인가를 먼저 밝힐 필요가 있다. 사진집 '아메리카인들'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사진들은 모두가 다큐멘터리 사진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분류하면 다큐멘터리 사진 중에도 에세이 성격을 띤 픽처 스토리(picture story)라고 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본래 어떤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앞서는 사진행위이다. 일찍부터 사진은 기계적 기록의 속성인 정확성과 객관적인 사실성으로 말미암아 정보전달의 기능을 주된 본령으로 삼아왔다. 사진은 전달목적을 우선으로 삼고, 기록적인 효용성을 기본적인 가치로 추구하였다. 어떤 사실의 전달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이 경우에 대중과의 연관관계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하여금 자연히 사사로운 입장을 떠나서 한 시대의 목격자이며 증인으로서 대중을 대신하는 공적인 위치에 서게 한다. 공적인 위치에서는 개인적인 취향이나 발사이 억제되고 정확하게 대중이 알고 싶어하고 보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전달목적이 우선하는 경우에는 전달할 만한 가치있는 관심거리에 초점이 모여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주로 대중의 관심과 흥미에 따라 사건 중심으로 쏠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프랭크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이같은 기본적인 생리를 버리고, 대중을 대리하는 공적인 입장을 파기하였다. 사회적인 연대의식을 갖고 대중들의 공동의 관심사와 공통된 가치의식을 추구하기에는 그 자신의 의식이 너무나 복합적이고 심한 자의식에 빠져 있었다. 그는 남들을 대신하는 공적인 유대감에 따라서 자기 자신의 테두리 안을 맴도는 독백의 형식을 따랐다. 자신에 대한 존재의식 자체가 복합적이고 불안하기 때문에 자신과 남들의 관계나 사회적 연대의식이 괴리되어 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사진적 입장은 사적(私的)인 각도에서 목격자로서가 아니라 방관자로서 대사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러한 프랭크이 입장은 기계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유형 가운데 하나로 전형적인 삶의 단면을 새롭게 제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프랭크의 사진세계는 사적 현실이며, 개인적인 다큐멘터리로서 사적인 진실을 피력한 것이다. 그런데 사진은 반드시 선행조건으로 먼저 대상이 앞에 있어야 하며, 대상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든것을 해결한다. 사진은 언어예술과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세계를 직접 대상화할 수는 없으며, 눈에 보이는 것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대상으로부터의 출발이며, 대상 본위로 기계적인 기록의 기능을 동원하여 현실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살려낸다. 더구나 다큐멘터리 사진에 있어서는 현실 그 자체의 기록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런데 프랭크는 외부적인 현실과 객관적인 현실에 앞서, 내면적인 동기와 자신이 직접 직면하고 있는 사적인 현실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서 사진의 기록성이라는 기계적 속성의 한계와 이에 대한 극복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의 개인적인 현실세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내면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를 기계적인 기록성의 바탕위에서 사진의 영상적인 표현을 통해 새롭게 극복하였다. 대상과 사진의 이미지와의 합일이라는 기계적인 충실한 복사기능을 넘어서서 내면적인 심상과 광학적인 이미지와의 일치를 꾀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사진에 감정이입의 수법을 도입하였다. 그것은 대상에 대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 대신에 '어떻게'자신에게 느껴졌는가를 심리적으로 검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텅 빈 마음으로 어느 현실공간 속에 들어서서 그 그때의 상황이 어떤 느낌을 촉발시키며, 그 분위기가 어떻게 의식의 흐름을 유도하는가를 파악해서 이러한 느낌과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을 전면으로 드러내었다. 그는 내면적 효과를 고스란히 드러내기 위해 일체의 극적인 요소나 사건을 배제하고,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순수한 느낌과 의식을 소중하게 살렸다. 될 수 있는 한 설명적인 요소들은 걸러내고 피부에 와닿는 공간적 분위기와 심리적인 반응을 강조하였다. 대상에 대한 접근방식은 다른 사진가들이 대상을 인식하려고 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분위기로 느껴서 생활감정을 파악하려고 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프랭크는 현실공간 속에서 느낌으로 일치되는 상황에 감성적인 조건반사를 이루어 나갔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개인적인 진실의 추구이다.

이러한 사진적 태도는 일찌기 프랑스의 앗제로부터 시작되어 까르띠에-브레쏭이나 워커 에반스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역사의 한가운데 서서 사건의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데 반해서, 이들은 역사의 뒷전으로 머물러서 개별적인 생활감정의 공감을 추구하였다. 그는 거대한 미국을 정면으로 부딪쳐 나간 것이 아니라, 혼잡과 소란을 피해 미국의 뒤안길에서 은밀하고 개인적인 감정의 흐름을 카메라에 담았다.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목적은 접어두고 가슴에 부딪쳐 오는 감성적인 흐름을 쫓아서 셔터를 누른 것이다. 아제나 까르띠에-브레쏭 그리고 워커 에반스의 대사에 접근하는 방식은 내밀한 가슴을 열고 다가서서 대상과 하나로 만나는 친화적인 심리의 거리 극복이다. 이와는 달리 프랭크의 겨우는 서로간에 끝내 넘어설 수 없는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감정과 의식을 영상화했다. 이같은 행위는 사진영상의 새로운 의식화 현상이다. 언어가 인간의 미묘한 감정이나 복합적인 의식과 밀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이 하나의 영상언어로서 단순한 재현이나 표현의 차원을 넘어서서 전달매체로서의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터넷 자료>



* 그의 작품 *

http://m2.aol.com/UvGotMail/frank/frank.html
http://www.cis.yale.edu/amstud/r66/fr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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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권종철님의 댓글

권종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사진가입니다.
링크따라가서 다시 사진 감상을 하니 너무 좋군요..

감사합니다.

진인구님의 댓글

진인구

현대 다큐사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하는 이분을 포함하여
상당한 수의 위대한 사진가라는 사람들이
과연 Great 라는 표현을 붙여도 될만큼 위대한 사람들인가?
하는 것은 오래된 저의 의문입니다.

일생을 통하여 그의 세계가, 그의 작품들이, 전문가 집단에서 뿐만 아니고
일반 대중에게도 사랑받는 정도가 되어야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역사상
이런 '위대한' 이란 수식어를 동반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나
이 Robert Frank 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는 좀 적당치 않은 사람이 아닌가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는, 이민자로서, 이방인의 눈으로 Americans 를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 뿐입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우리의 기억에 남는 것은 그 Americans 뿐이 아닌가요?
그가 몇살까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그는 단지 몇년간 빤짝였던 사진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는 현대사진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pioneer 임에는 틀림없으나
그의 작품세계는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진산님의 댓글

김진산

현대 사진과 나


시대에 부응하는 사진, 그것을 굳이 현대 사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이해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 싶습니다. '현대적'이라는 말처럼 애매 모호한 것도 없을 터이지만 20세기 서울에서 거주했든, 13세기 중국에서 살고 있었든 간에 그 당시에 제작된 작품은 그 작가에게 있어서 '현대적'인 것이 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설사 13세기 고려시대 양식이라 해도 현재 제작한 작품이라 하면 역시 현대적인 것이 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라고 표현되는 '현대'의 뜻은 대개 협의의 의미로서 '진보적인 새로운 태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통 1960년대의 개막과 함께 출발한 사진을 지칭하는 '현대사진'은 50년대 후반에 발표된 '윌리엄 클라인'의 '뉴욕'과 로버트 프랭크의 '미국인'을 그 시발로 보고 있습니다. 현대 사진의 기폭제가 된 이들 작품에는 종전까지 금기(禁忌)시 해왔던 내용을 담거나 전통적인 기법의 무시와 종래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충격영상 등을 담았고 이것이 시대의 새로운 흐름으로 등장한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의 사진을 보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지고 알 수 없는 사진이 곧 현대 사진이라는 오해를 불러오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현대 사진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과거의 사진에서 볼 수 있던 기성의 모든 법칙을 배제하고 작가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사진을 통제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과거의 사진은 인간 생활 기록이 중심이 되어 절대 비 연출은 물론 사진의 현실 대응, 즉 현실 재현이 목적이었으며 화화성의 철저한 배제와 과학적 법칙의 절대 존중이 기본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진은 이런 원칙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런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커다란 특징입니다.

연출과 비 연출을 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 현실을 재현하거나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럴 경우는 사진이 거짓이든 사실이든 관계없이 오직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이 감동적으로 표현되어 있는가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출이 문제된 것은, 찍힌 것은 사실대로 나타난다는 특성 때문에 사진이 보도수단의 핵심으로 자리 잡던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사진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났으며 기록으로서 보다 뛰어난 매체가 등장하였기에 사진이 그 자리를 물려준 마당에 연출여부는 더 이상 사진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예술성에서 그 가치를 찾으려 하는 것이 현대 사진의 또 다른 특징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회화성을 거부하던 시대 역시 회화성 자체보다 사진을 회화의 한 종류로 알고 회화 미학을 사진에 그대로 적용하려던 잘못을 부인하던 것이었습니다. 기록성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사진이 독자적인 예술성을 확립한 마당에 회화의 영역을 사진에 도입하여 사진 표현의 영역을 넓히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진 영상의 과학적 순수성을 존중하는 것 역시 영상의 중심성에 손상을 입힐 우려 때문이었지만 기록성에 근거하지 않는 사진에서는 손질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손질은 현실을 비 현실로 바꾸어 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사진의 추상적 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현대사진은 '언어 밖의 세계'를 감지하여 이를 시각화하기 시작하였다는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이외의 어떤 매체로도 표현 불가능한 상황을 영상화했을 때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분명히 시각적으로는 전달되는 그런 의미가 '언어 밖의 세계'입니다.

이렇듯 과거의 제약에서 벗어나 뚜렷하게 구별되는 현대 사진은 몇 가지 특징적 현상을 보입니다.

첫째, 시간성을 중시하는 인식, 둘째, 묘사에서 표현으로 이전하는 기능적 확장, 셋째, 휴머니즘의 소멸, 넷째, 추상화 비 현실화, 다섯째, 탈 장르와 복합적 영상의 범람, 여섯째, 표현 방법의 다양화 등입니다.

시간성을 중시하는 인식이란 근대 사진이 '어떤 상황을 고정시키기 위해 셔터찬스나 속도를 이용하는, 즉 시간보다 공간에 비중을 두었던 것'인데 반해 현대 사진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공간, 즉 움직임과 연관하여 영상성으로 이어지는 접근방식'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묘사에서 표현으로 이전한다는 말은 외형적 기록에서 내면적 창조의 세계로 심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묘사가 대종이었던 근대사진에서는 기록성이 유일한 목적이고 미학적 근거였으나 현대사진은 표현을 중심으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이는 사진의 대상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에서 찾는다는 뜻으로써 영상이 과거처럼 현실에 머물지 않고 영상이 만들어내는 비현실성, 창조성을 발견, 영상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휴머니즘의 소멸이란 휴머니즘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회의와 함께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값싼 감상주의와 결별하는 것을 뜻합니다. 있는 사실을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관찰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써 근대 사진과 달리 사진의 결과나 영향에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는 것이 차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큼 현대사진은 방임이라 할 정도로 작가의 입장은 냉혹합니다.

통제와 질서에서 벗어나 일견 자유로워진 현대인의 심성이 오히려 연대감과 일체감을 상실시켜 낱낱으로 흩어지고 왜소해져 가는 현대인의 자의식을 다루고 있는 것이 현대사진입니다. 그렇기에 때로는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것도, 인간과 문화 자체가 물질화하고 소비되는 현실의 자연스러운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뉴 토포 그래픽스'를 비롯한 풍경사진에서도 보이는 등 '인간관찰'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사진 전반에 걸쳐 보이는 특성입니다.

사진의 추상화 비 현실화의 경우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던 사진의 한계였습니다. 흔히 회화적 의미나 사진술에 의해 제작된 추상회화를 사진의 추상으로 잘못 인식하기도 했는데 사진에서 의미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진 추상이란 '언어 밖의 세계'처럼 눈에 보이기는 하되 언어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표현해 낼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시각화 해내는 것, 또는 벌어지고 있는 상황, 전혀 현실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을 시각화한 경우 등을 말합니다. 현실적 기능이나 감각을 원하지 않는 사진을 일컫는 추상사진은 애초부터 현실적 시간이 들어설 수 없는 사진을 원점부터 다시 출발시켜 독자적 미학을 찾아낸 방법이라 할 것입니다.

탈 장르와 복합적 영상의 범람은 사진이 기록에서 벗어날 때부터 예견된 것들입니다. 이들 장르를 허문 대부분의 작품들은 엄밀하게 말해서 사진적인 외양을 가지고 제작 과정이 사진술을 택했을 뿐 순수한 사진적 입장에서 제작된 '사진적 사진'에 비해 순수성에서 문제를 가지고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에서는 이들을 모두 미술가(그들은 사진도 판화의 한 종류로 보고 그들 범주에 사진을 포함시키기도 하지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이 현실을 대상으로 한 인식작용을 독자적인 미학으로 삼지 않고, 설혹 현실을 대상으로 한다 해도 순수한 인식작용을 통한 현실 파악이 아니라 현실을 이용하고 개조하는 창작 대상이라는 점과 우리들에게 제기하는 문제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장르나 외양을 따지지 않는 것이 또한 동시대 예술 전반에 걸친 인식인 관계상 사진의 범주에 넣는 것입니다. 사진의 시대적 의미와 가치, 즉 사진의 복제성과 거기에 따른 대중성이 현대와 같은 첨단 과학사회, 정보사회, 대량 소비 사회를 보다 은유적으로 함축하고 있음을 인식한 화가들이 과감하게 사진에 참여하여 철저한 회화의 인식에 사진을 접목한 것이 탈 장르, 복합 영상의 범람이지만 이런 복합 영상은 사진에 한하는 것이 아니며 사진의 영역을 넓히는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표현방법을 다양화하는 것 역시 사진이 기록성에서 벗어난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는 사진의 목표가 종래의 기록 수단에서 표현 매체로 그 인식을 달리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과거부터 전통적으로 인정해 오던 방식을 벗어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거나 문제될 것이 없어진 것입니다. 온갖 특수 기법, 인위적 채색, 복수 사진을 여러 형태로 묶은 한 개의 프레임 사진, 직접 회화적 처리를 한 사진 등등 시각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모든 기법을 동원하는 이유가 바로 영역의 확장과 자기 심화를 위한 최대한의 모색이나 노력으로써 매체 존속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구책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진에 대한 인식을 정립함에 있어서 공모전을 거치는 사진가에게 당부하고싶은 것이 있다면 공모전 사진을 마친 '나'는 이제 어떤 사진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현대 사진의 특성에 대한 오해를 막기 위해 말을 덧붙인다면 현대에 사니까 현대 사진을 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제외한 다른 경향의 사진이 오늘날 완전히 사라졌거나 사라져야 한다는 말에도 결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사진의 대세로 등장하는 디지털 사진과 같이, 시대적으로 유행하는 사진 경향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방법이 새롭지 않아도 추구하는 것이 새롭고 참되며 아름다울 때 그것은 시대와 유행을 초월하여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어떤 사진을 할 것인가는 현재 자신의 사진을 잘 돌아보고 그것이 최선인가 더 나아갈 방향은 없는가 적확(的確)하게 파악한 후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사진의 현대성은 결국 주제의식의 문제이지 표현 양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이 장의 글은 한정식 님의 '사진의 변모'에서 상당부분 옮겨왔음을 알려드립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강인상

얼마 전 "The Amerians"를 선물 받아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브레송을 참 좋아해서

많은 기대를 하진 않았지만,


아메리컨스 역시 참 좋은 사진들이 가득하더군요.


또 한명의 멋진 사진가를 접한 마음에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눈여겨 볼 사진가입니다.

이혁진님의 댓글

이혁진

The Americans 는 지금 봐도 여전히 강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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