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 원했던 것을 가장 잘 실행한 작가 폴 스트랜드(Paul Str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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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구덕관
- 작성일 : 07-10-1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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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난 사진에서의 3대 산맥을 말했었다.
이 3대 산맥의 영향은 60년대 사진표현의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진의 주류를 이끌며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스트랜드 만큼 철저하게 스티글리츠의 정신을 사진으로 옮긴이도 드물 것이다.
결국 스티글리츠의 사진 분리 운동이란 것은 그 당시 사진계에 팽배해 있던 사진의 회화적 표현에 대한 반항이다.
그것은 카메라로 피사체를 정확하게 표현 한다는 기계적 특성을 될 수 있는 대로 무시하고 좀 더 부드럽고 회화적 기법으로 표현되던 사진표현 방법에 대해, 사진이 갖는 특성이야 말로 정확한 기계적 특성을 살리는 예술이라는 주장이었었다.
그 주장이 주는 당시에 충격은 예전에 음악의 재생에서 우리가 카트리치를 통해 레코드판 홈의 깊이에 따라 음색을 내는 재생 방법 시대에 나온 컴팩트디스크(CD) 플레이어쯤 될 것이다.
요즘 필름을 넣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디지털 사진과의 충동에서 느끼는 충격쯤 될까......
처음에 디지털 음을 통해 재생되는 음악을 듣고 음악 애호가나 오디오 매니아들은 너무 기계적인 소리여서 인간성의 상실이라는 평을 했던 것처럼 그 당시로는 너무 기계적인 표현은 예술로서 인정 하기에는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이 보편적 사고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진정한 사진예술이라고 혼자 부르짖던 스티글리츠의 외로움은 이해된다.
그러한 주장을 편 스티글리츠 마저도 사실은 철저하게 그 주장을 사진시각으로 보여주는대는 부족함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카메라가 갖는 기계적 특성을 최우선으로 하여 피사체에 근접하는 전공법으로 피사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나 내면의 이미지를 정확하게 사진으로 기록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사진표현을 그쪽으로 기울인 스트랜드야 말로 스티글리츠의 생각을 가장 잘 사진으로 표현한 작가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우리는 그 시대적인 배경을 무시 할 수 없다.
그것은 산업혁명의 결과일 수 있다.
산업혁명이란 것은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불의 에너지화”이다.
그 동안 난방과 조리로만 쓰이던 불이 증기기관들로 인해 힘이 되어 준 것이다.
그 전에 생산이란 것은 모든 것이 수공업이었다.
그러한 생산 형태가 인간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생각 할 수 없게 한 것은 필요로 하는 소비숫자를 충족시켜 주기위해 인간은 각자 자기의 생산영역에서 일 외에는 다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산업혁명은 인류에 참으로 일일이 열거 할 수 없을 만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 중요한 한가지가 인간을 일에 노예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의 사고가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들을 일의 노예에서 해방 시켜준 것의 기초가 과학임을 인지하고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모든 생각의 바탕에 과학적 사고를 갖게 하였다.그러한 사고들은 예술에 있어서도 그 바탕에 과학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고의 시대적 배경이 과학에 산물일 수 있는 카메라의 기계적 특성에 대해 대중들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특성을 살린 표현도 예술이라는 주장이 대중에게 먹혀들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사실 폴 스트랜드는 1930년대 이후에는 사진보다는 영화에 더 열의를 쏟았지만 그가 사진 쪽에 몰두하던 20년대의 사진은 오늘날 사진 발전에 많은기여를 한 것이고 그것은 바로 그의 스승이기도 했던 스티글리츠 마저도 정확하게 정착 시키지 못한 기계적 특성에 의한 정확한 기록을 완성시킨 사진가라 보아야 할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캔디드 포토(Candid Photo) 쪽에 가까운 인간의 사는 역동적인 모습에 주안점을 두고 촬영했다면 그는 만들어진 형태나 자연이 갖는 형태의 조형성의 정확한 관찰도 훌륭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보여준 좋은 예일 것이다.
그것은 후에 - 다음에 이야기 할- 웨스턴에 와서 완벽한 하나의 예술의 형태를 확립하는 기초가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언젠가 나는 인터뷰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사물의 외관이 아닌 피사체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싶다는....” 폴 스트랜드야 말로 오늘날 우리가 다루고 있는 모든 피사체의 종류에 카메라를 대면서 그것이 생명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그 피사체의 내면의 이미지와 교감하려 노력 했던 작가가 아닌가 생각한다.
피사체 앞에서 카메라를 들고 당당한 마주 봄에 의한 정확한 관찰은 그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는 피사체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고 그로 인해 무언가 조금 당황 될 정도의 깊은 이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야 말로 그가 말하려고 했던 즉물주의 사진이 갖는 또 하나의 리얼리티 미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글 : 사진가 조인상 www.photoclass.co.kr
댓글목록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한동안 그의 사진들이 좋아서 폴 스트랜드에 빠졌던 적이 있습니다.
경향이라는 구분이 있겠지만, 실상은 선을 그을만큼 명료하게 모든 사진들이 분류되지는 않더군요.
그러나 그들이 찾고자 했던 긍국의 목적을 이해하기에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을 느낍니다.
그의 사진들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웃 같아지더군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김익겸님의 댓글
김익겸
1917년까지 전개된 ‘사진 분리파 운동’은 “사진의 독자적인 시각적 특성을 찾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사진이 갖고 있는 기계적 기록성과 렌즈의 사실적인 정밀성에 관한 미학을 주장했는데, 바로 이 시각운동이 현대사진에까지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20년대 사진인쇄술이 발달하고 신문, 잡지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저널리즘 사진도 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은 철저한 시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대상에 사진가의 개인적 관점(시각과 주제의식)을 실어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찍는 사진이다. 당시 미국에서는 급속한 산업화로 수많은 이민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뎌내야 했는데, 이들은 이러한 시대상을 사진으로 이끈 최초의 다큐멘터리 작가들인 셈이다.
미국의 대공황이 생각나는군요... 항상 느끼는것이지만 예술가?는 그냥 그 작품만 보고 느끼면 되는것 같습니다. 우상시 할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자기가 느끼는 표현을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하는 것입니다. 사물의 외관이 아닌 피사체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 싶다는.... 피사체의 내면세계가 과연 있을까요? 남들이 정해놓은 기호를 바꾸어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사진을 잘 모르는 저에게 좋은 정보를 주셔서 잠시나마 우뇌를 써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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