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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진가 2. - 으젠느 앗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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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도웅회
  • 작성일 : 02-05-13 16:21

본문

▽ No, 206
▽ 이름:도웅회 (redelmar@hanmail.net)
▽ 분류:기타
▽ 2002/1/25(금) 15:42 (MSIE5.5,Windows98,Win9x4.90) 211.234.193.240 1152x864
▽ 조회:368

위대한 사진가 2. - 으젠느 앗제 -




Eugene Atget


위대한 사진가란 사진을 기술적으로 잘 찍는 이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처한 당대의 역사적 좌표를 사진으로 자각하

고 확인해 나간 이들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위대한 사진가들의 사진은 단순한 표현행위가 아니라 자기 시대의 발언이요, 대변인 것이다. 결국 사

진사의 계승과 발전은 시대적인 자각을 한 사진가 들에 의해 이어지는 시대의식의 전개라고 하겠다.


이러한 시대의식은 사진가 들의 성향에 따라 논리적, 이성적인 경우도 있고, 직관적인 통찰력에 의한 경우도 있

다.


시대의식을 지적으로 자각한 사진가 들은 논리적으로 자기 시대의 사진 적인 주장을 외쳤고 직관적으로 통찰한 사

진가 들은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이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시대의식을 견지한 사진가 들이 개성적이고도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시대의 역사적

좌표를 올바르게 인식함으로써 자아의 동일성을 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독창성이란 다름 아닌 독자적 유일성인데, 이것은 개성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작가가 서 있는 자리가 전무후무한

독자성을 띤다는 것을 의식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1900년대 초기에는 사진적 시각의 기본인 기계적 기록성의 자각과 인식의 시기이다. 19세기의 사진가 들은 광학

적 시각의 기계적 기록성은 예술적인 표현의 장애요소로 생각하여 왔다. 그러나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나 으젠느 앗제(Eugene Atget) 같은 이들은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것이야말로

사진의 독자적인 표현의 기본임을 작품활동을 통해 입증하였다.


이것은 과학적 세계관에 의해 대두된 사실주의의 사진적인 수용으로, 사진기의 렌즈를 현실을 직시하는 예술가의

눈으로 자각한 것이다.


으젠느 앗제는 미국의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원점으로 생각된다. 그는 19세기 후기부

터 20세기 초기까지 한 세기의 전환기에 활약한 사진가 이다. 흔히 앗제를 '카메라의 시인' 이라고 부른다. 그 까닭

은 그의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인 데다가 사진마다에서 시적인 정감이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Eugene Atget's Life

앗제는 185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려서부터 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열 살 넘어서 부터는 배를 타고 뱃사람의 잔심부름

을 했으며, 스무 살 때에는 떠돌이 극단의 배우가 되었다. 배우라야 단역에 지나지 않았고, 주로 무대 뒤에서 잡일

을 거드는 일이 고작이었다.


유랑극단의 생활이란 어둡고도 고달픈 것이었다.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고 내일이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그의 청

춘은 찌들대로 찌들어 버렸다. 그러니 정식으로 결혼할 형편도 못 되고, 어쩌다가 열 살이나 위인 과부와 동거생활

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운의 나날을 보내다가 그는 마흔 살이 갓 넘었을 때 파리로 갔다. 사진가로서의 생활은 이때부터 시작되

었다. 광학렌즈가 달린 낡은 카메라를 마련하여 파리 시내를 두루 다니면서 찍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예술 행위라

기 보다는 화가들이 그림을 좀더 정확하게 그리기 위한 도구로서 사진을 제공해주고 돈을 버는 생계수단이었다.


앗제는 하나의 직업으로 사진가를 선택하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진을 판매하였던 것이다. 예술, 창작을

위해 한평생 바친 사람들도 그 위상을 떨치기가 어려운데 앗제의 경우처럼 생계수단으로서 시작이었던 사진이 높

이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여기에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분명히 앗제에게 있어서 사진은 일차적으로는 생계 목적의 수단

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부차적으로는 불행한 인생살이 속에서 항상 혼자였기 때문에 외로웠고,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었

기 때문에 사진은 그에게 세상과 연결하는 유일한 끈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세상과의 연계되는 부분을 사진으로 생각하고 자기표현을 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사진이 이용되어 하나의

탈출구 역할을 한 셈이다.


그의 친구였던 앙드레 깔메뜨(Andre Calmettes)에 따르면 앗제는 한때 파리와 그 주변 환경의 예술적이며 회화적

인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콜렉션으로 창작해내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앗제는 예술사진가, 즉 예술작품을 위한 사진가라고 자칭했고, '예술가를 위한 다큐멘트'라고 새겨진 서명을 깡빠

뉴 프르미에르(Campagne Premiere)가 31번지 아파트5층의 그의 암실 문에 내걸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파리의 역사적 건물들을 세부적으로 사진에 담고 있었다. 그는 또 일련의 쇠창살문과 파리

의 분수, 베르사이유 공원의 조각상들을 찍었으며, 파리 소재의 중세 교회 조각상들도 찍었다.


그는 이 사진들을 파리의 박물관들에 판매했다. 그러나 예술작품이나 역사적 기념물만을 찍은 것은 아니다. 그는

파리의 모든 면모를 사진에 담았다. 가게 진열장이나 갖가지 수송 기구들, 우산 행상이나 전등갓 행상으로 끼니를

잇는 초라한 사람들, 빵 배달꾼, 손수레를 끄는 사람들, 또 궁전의 실내, 소시민 가정, 넝마주이들의 숙소 내부 들

을 촬영했다. 나무와 꽃, 그리고 떨어진 가을 낙엽들도 찍었다. 이 각각의 소재는 한 가지 범주마다 거의 백여 점씩

에 이르는 시리즈를 구성한다.


앗제는 깔메뜨가 말했듯이 진정 '수집가'였다. 뿐만 아니라,그의 친구들이 그렇게 불렀듯이 그림 그리는 사람이자

판화가 (un imagier)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단순한 기록 이상의 수준을 넘어서는 서정적인 작품이라는

것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화가들을 상대로 한 이러한 돈벌이는 근근히 입에 풀칠이나 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달리 돈벌이

를 할 길이 없는 그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연명해 나갔다. 화가들이 그의 사진을 사는 것은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

기 위한 자료로서 였다.


그는 파리의 몽빠르나스의 빈민 아파트의 문에 '화가를 위한 자료' 라는 간판을 걸고, 사라져 없어져 가는 파리 시

내의 건물과 많은 장소를 찍었다. 제일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정부의 기록보관소가 파리의 역사 관계 사진과 폭격

으로 없어진 기념적인 건물들의 사진을 사 주었다.


앗제는 한평생을 세상과는 동떨어져 고독하게 살았다. 그는 우울증과 자폐증에 걸려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뒷전으로 처져 혼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외톨이로 세

상과 등져있는 앗제를 발견한 것은 미국의 화가이며 사진가인 만 레이였다.1926년 만 레이는 앗제의 사진 넉 점을

골라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인 'SURREALIST의 변혁' 에 실어주었다. 이것이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사람들 앞

에 선보인 계기가 되었다.


그후 만 레이(Man Ray)는 그의 조수인 미국의 여류사진가 베러니스 애보트(Berenice Abbott)에게 그를 소개했다.

애보트가 그를 찾아간 것은 앗제가 죽기 얼마 전이었다.


두 번째로 그녀가 다시 그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는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서둘러 사방으로 수소문해

서 그녀는 앗제가 남긴 2천여 장의 원판과 1만여 장이 넘는 사진을 찾아내어 미국으로 가져갔다. 이리하여 그의 사

진은 1968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영구 보존하게 되었다. 베러니스 애보트가 서둘러 앗제의 사진을 거두지 않았던

들 귀중한 그이 사진이 헛되게 없어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모진 고생과 고독 속에서 박복하게 한평생을 살아온 그가 숨을 거둔 것은 1927년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사진이 세

상에 처음으로 공개된 바로 다음해였다. 살아 생전에는 그렇게도 불운하게 살았고 또 이름 없이 죽어간 그가 오늘

날에 와서는 사진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긴 대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특히 근래에 이르러 젊은 세대들 가운데서

그의 사진에 대한 평가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살았을 때와 죽고 난 다음의 앗제에 대한 평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차이를 보여준다. 이제 와서 그의 사진이 높

이 평가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그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전환기에 사진가로서

지난 세기의 잘못된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 세기가 헤쳐 나아갈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

룩한 사진의 업적은, 예술을 표방하던 살롱사진가 들이 사진의 기본인 기계적 기록성에서 멀리 떠났던 것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은 것이다. 사진의 기계적 기록성 만으로도 예술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는 본보기를 그가 보

여준 것이다.


물론 그의 사진이 기록성에만 치중해 있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적 기록만으로

도 충분히 예술성을 표현가능 하다는 점이 다른 사진가 들과 다른 점이었고 또한 그를 인정하게된 계기가 된 점이

기도 하다.


그의 사진적 특징을 볼 것 같으면 장소는 주로 야외에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었고 그 중에서도 화려한 거리보다

대부분 사람이 없는 뒷골목을 위주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 가끔씩 그의 사진에 사람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사진 속

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앗제와 비슷한 처지의 밑바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파리 시내만 맴

돌며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기록사진을 주로 찍었다.



Atget's Equipment

앗제의 기법은 가장 간단한 것이었다. 뷰 카메라는 항상 삼발이 위에 올려놓고 써야 하는 18x24㎝ 크기였고, 그 렌

즈는 충분히 조여지는 래피드 렉틸리아니아 렌즈였다.


그 초점거리는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다. 그 카메라는 그가 죽자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추정해 볼 때 그 카메라는

초점거리가 아주 짧은 것이었을텐데, 왜냐하면 숱한 그 사진들은 대부분 급격한 원근감을 보여주고 있으며, 음화

의 윗 부분들의 이미지가 공공연히 흐려지는 현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리 감광판을 한낮의 햇빛 아래에서 아리스토타입으로 인화했었다. 금 표백제로 명암을 조정하는 앗제의 기

술적 접근 방식은 19세기 식이었는데, 그의 사진 대부분은 1900년 이후에 만들어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

는 스냅숏 방식으로 촬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움직이고 있는 피사체는 종종 그 상이 흐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

아. 그는 인물을 찍을 때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그 사진의 모든 세부는 대단히 또렷하다. 그

는 인공광을 사용하지 않고 노출계도 쓰지않고 자신의 많은 경험으로 노출을 조절했다.


Atget's Photography

앗제의 수천 점의 사진 가운데에는 기록 이상의 수준을 넘어선 서정적인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그가 남다른 시각

의 소유자였음을 말해 준다.


그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은 그런 자리에서 인간적 성격을 발견해낼 줄 알았다. 그의 실내 사진들을 보

면, 앗제가 방안에서 초점을 맞추고 촬영하는 동안 그 방 주인은 카메라 뒤로 잠시 물러서 있다가 촬영이 끝난 뒤

에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 같은 느낌을 전해 준다. 옥외 사진의 경우 호기심 많은 사람들의 방해를 피하려

고 그는 이른 아침에 작업했다. 그 결과 그의 그림들은 이른 아침빛의 분위기를 담고 있다.


흔히들 시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현실을 넘어선 피안 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앗제는 현실 속에 깃들어 있

으면서도 우리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시의 세계를 발견한다. 그 당시 살롱사진가들이 머리속에서나 그리던 시의

세계를 표현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앗제는 현실에 숨어 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낸다. 그가 현실에 숨어 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의 기질 탓이다.


그는 현실에 접근할 때 머리보다도 가슴을 앞세우는 사진가 이다. 그러니까 그는 무엇이든 눈으로 보기도 했지만

가슴으로도 보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하나같이 정서적인 정감이 짙게 배어 있다. 그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

은 생활감정의 공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 쌓이기 마련인 삶의 앙금을 가슴으로 느꼈

다. 현실공간 속에서 삶의 진실을 마음속 깊이 느낀 것이다. 이렇게 느낌을 통해 대상과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

면 사진은 자연 분위기 조성이 주조를 이루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모두가 분위기가 있는 정감

적인 것들이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가 화면 속에서 서로가 한데 어울리어 음악의 화음과 같은 분

위기를 빚어낸다.


앗제가 찍은 사진에는 파리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공기감마저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신비롭고 환상적

인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생활감정의 교감이 바로 높이 승화된 시적인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

한 사진들을 찍은 것은 남들처럼 예술사진을 표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한낱 밥벌이로 기록한 것들이다.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상과 깊은 내면적 공감을 이루었느냐는 것이다. 앗제의 경우 의도적이었거

나 뚜렷한 자신의 주관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가 깊이 빠져 있던 고독이라는 늪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만

남의 욕구가 사진을 통하여 독자들과 깊은 공감을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지에까지 다다른 것은 천성적

인 감수성과, 남달리 민감한 직관력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타고난 예술적인 천성이 모

진 고생과 심한 시달림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많은 예술가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

이다. 비록 앗제가 단순히 파리의 기록사진만을 찍었지만, 타고난 천성과 후천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자신도 모르

게 대상과 정서적인 깊은 만남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앗제의 사진은 보는 이들과 내면 깊은 데서 하나로 만

나 정서적인 교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앗제가 찍은 사진은 거의 대부분이 옥외에서 찍은 것들이다. 또한 그의 사진은 전부가, 거리의 전면이 아니라 뒷골

목이거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만을 골라서 찍은 것들이다.


그는 어디든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문 밖에 서성거리면서 사진을 찍었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서 찍었다. 촬영 시간도 이른 아침이나 저녁 등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시간에만 국한되었다. 그래서 숱한 사진

을 찍었지만 그의 사진에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은 별반 없다. 어쩌다 간혹 등장하는 인물은 자기와 같은 처지의 이

웃뿐이다. 그는 매우 신경이 여리고 숫기가 없어 사람의 눈을 피해서만 찍었고, 안심하고 마음을 놓을 만큼 만만

한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면 셔터를 누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은밀하고도 호젓하게 혼자서 떠돌던 그는 대

상과의 비밀스런 내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니까 그가 사진을 찍은 일은 밥벌이의 방편이었지만 심리적으로 자

신을 대상에 드러내는 유일한 자기 표현의 수단이기도 했다. 모든 것과의 단절 속에서 오직 하나뿐인 만남의 통로

가 무의식중에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은 생계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

기 구원의 방편이기도 했다. 아무하고도 어울릴 수 없고 또한 어울려지지 않는 그였지만 대상을 찾아서 셔터를 누

르는 순간 이제까지 갇혔던 자아가 탈출구를 찾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은 시간적이기보다는 공간적이다. 물론 그가 들고 다니는 기계가 대형카메라인 탓도 있지만, 심리적으

로 유동하는 시간보다는 정지된 공간 속에서 정신적 안정감을 더욱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찍은 사진의 공간은 고요가 쌓이는 정적의 공간이다. 그리고 막연한 기대와 여운이 짙게 깔려 있는 공간이

다. 그런데 미래에의 예감과 과거의 여운은 사실은 인기척이 곧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며, 누군가가 방금 지나버

린 흔적으로서의 여운인 것이다. 그가 찍은 사진은 거의가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사람이 사라진 공간이 중심이면서 사람이 빠져버린 데서 이루어지는 묘미가 앗제의 사진

적 특징이다. 사람이 빠져버린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생활감정이다. 남몰래 인간의 생활권 안으로 끼

어 들어 인간에게 접근하려 한 것이다. 그의 사진에 깔려 있는 생활감정은 다름 아닌 인간의 체취이다. 이렇게 대

상에 대한 남다른 접근방법으로 그의 사진은 색다른 효과를 거둔다. 앞으로 나타날 예감으로서의 숨결이 화면 속

에 스며 있는 것이다.


다시 앗제의 작품을 다큐먼트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이유를 살펴보면,


1910년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국제 사진대회에서 다큐먼트는 "다양한 성격의 연구를 위해서 사용될 수 있어야

만 하며......... 여기에서는 사진적 아름다움이 2차 적인 것이며, 그 상은 매우 뚜렷하고, 세부가 풍부하고, 사진이

가장 덜 훼손되도록 조심스럽게 인화되는 것으로 족한" 이미지로 정의되었다.


이러한 정의는 그 형상들을 고려해볼 때 모호하고, 또 다큐먼트를 본질적으로 일거리를 목적으로 한 그 유용성에

의해서 규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다큐먼트를 실현하는 데는 기술적인 기능에 부응하기 위해서 세부와 선명

도에 주의를 기울이면 다 되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1910년에는 건축의 세부, 자연탐구, 라디오그래피,

연속촬영사진 등........다큐먼트의 여러 가지 유형들이 있었다. 거기에는 전문적인 사진가들 가운데 앗제는 1926

년 초현실파 아방가르드와 연결되어 사진 몇 점을 발표하는데 동의했다.


그의 사진 중에 '산형화' 라는 작품을 보면 중심에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는 두 개의 꽃을 보여준다. 보다 가까이 있

는 꽃은 뚜렷하며, 좋은 다큐먼트를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꽃 자체이다. 그 그림자는 흐릿한 돌담 위에 완벽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화면 윗부분의 꽃, 줄기, 잎사귀들이 왜곡되지 않고 정면으로 잘 보이도록 렌즈와 건판은

나란히 배치되었다. 사진기법의 모든 자원들이 한 점의 순수한 꽃 사진으로 종결되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식

물 해부의 보다 완벽한 이미지는 그것을 중성적이고 편평한 배경에 올려놓음으로써 얻을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본질적 특성을 발췌해서 추상적 공간 속에 그것을 투사함으로써 말이다.


그렇지만 앗제는 일반적으로 대상을 그 맥락 속에 놓아두기를 더 좋아했다. '산형화' 사진들은 그 당시 여러 가지

목적에서 제작된 그의 막대한 기록사진집 가운데에서도 아주 대표적인 것들이다. 이 원판은 그 꽃들을 전체 화면

에 끼워 맞추기에 앞서 부분들을 묘사하고자 하는 풍경화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요, 마찬가지로 꽃의 모티

브를 구상하는 장식미술가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앗제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부류의 고객에게 팔리

기 쉬운,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가능성을 지닌 미래와 , 두 가지 시선, 두 가지의 보는 방식에 바쳐진 이미지를 실현

했다.


앗제의 대부분의 다큐먼트들처럼 이 이미지도 이중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사진에서는 빈번히 같은 형상이 보기

에 따라서 서로 다른 기능을 충족시킨다. 또 그렇지 않더라도 텅 빈 공간이나 이상한 심연에 의해서 분리되기도 한

다. '입구에서' 의 경우가 바로 그것인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간판사진으로 활용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유리

창문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선술집의 생활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진에 몸담았던

전과정에 걸쳐서 앗제는 이렇게 다큐먼트 형상들에 여러 기능을 연결하기도 하고 분리하기도 하기를 즐겼다. 초

현실주의자들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리만큼 멋진 다큐먼트가 유래했다.


또한 1930년에는 베르니스 애보트는 그의 기록들을 모아 "앗제, 파리의사진가" 라는 사진집을 출판했다. 또한 이

사진집은 발터 벤야민으로 하여금 1931년에 "사진의 작은 역사"와 1936년 에세이 "그 기술 복제 가능성 시대의 예

술작품"속에서 세계의 사물을 비평하려는 사상을 발전시키도록 했다.


벤야민의 "사진의 작은 역사"는 짧은 글이었지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20세기에 관해서 논하면서, 그는 앗제로

부터 출발한다. 즉 "그는 퇴행기에 모든 초상사진의 관행에 퍼져 있던 질식할 듯한 분위기를 맨 먼저 소독한 사람

이다. 그는 이 분위기를 정화될 정도로 깨끗이 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최초의 사진 유파가 이룩한 반박할 여지없

는 공로인, 분위기로부터 대상을 해방시키는 수법을 채용한다,"라고 논했다.


초현실주의관점에서 앗제의 작품을 이야기해보면 그는 고물상점의 헌 집기나 판자집을 대수롭지 않은 정경으로

기록하는데도, 그곳에는 현실과 비현실이 요사스럽게 교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앗제는 일상성을 주제로 개척

한 최초의 사진가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열심히 일상적 모티브를 채집하고 있다. 그에 의해 채집된 비속한 사물

은 홀연히 비현실적인 색채를 띠기 시작하는 것이다.


대체, 이와같은 비현실감의 표현은 어떠한 수법에 의한 것일까. 그이 작품의 초점은 깊어, 주제재의 배경을 이루

는 미세한 데까지 초점이 맞아 있다. 또한 정경의 디테일을 재현한다. 그들 디테일은 주제재와 아무 관련이 없고,

또한 우연히 존재했을 뿐이다. 그가 겨냥한 대상, 다시 말해서 인물 등은 분명히 사진기를 의식하고 있다. 노출 시

간이 오래 걸리는 사진기이니 그것은 부득이하다 할지라도, 사진기는 분명히 인물을 응시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

인물을 둘러싼 환경의 디테일이 재현된 결과로서의 인물은 도리어 고립되는 듯이 두드러지게 대상화되어 있다.


사실 앗제가 과연 배경의 디테일까지를 의식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배경의 디테일이 주제재에 어떠

한 영향을 미치는가는 의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물을 정경으로서 포착하고 있기 때문에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더 나아가서는 앗제의 작품에서는 사진기의 위

치, 즉 앗제의 위치가 느껴진다. 그와 대상 사이의 거리에는 항상 어떤 적막한 분위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앗

제의 공간은 적막한 공간성인데, 그것은 그의 대상관에 수반되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대

상을 향해서 도전해 가는 타입의 사진가라면, 아마도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서 즉물적인 포착법이 될 것이다. 그러

나 앗제의 경우는 항상 어떤 공간을 놓고 대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또 그것은 대상의 정면에서 직선적으로 사진기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사진기의 위치를 대상을 향해 비스듬히

세트하는 독특한 카메라포지션과 카메라 앵글에서도 보여진다. 그것은 한갓 대상에게 입체감을 주고자 하는 이유

만은 아닐 것이다. 도리어 대상을 지나쳐 버리는 지점이거나. 또는 보다 많은 것을 멀리 전망할 수 있는 지점이기

도 하다.


대상을 지나쳐버리는 지점이란, 무심히 그곳에 멈추어 선 지점이기도 하며, 그것이 대상을 억지로 의식케 하려는,

그야말로 전반대의 수법임은 명백할 것이다. 이렇게 무심을 가장하는 카메라 아이(camera eye)가 벤야민으로 하

여금 '인적이 없는 범행 장소'와 같은 사진이라고 평하게 한 것이 아닐까. 한편, 보다 많은 것을 널리 보는 앵글이

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경의 디테일의 보다 많은 재현과 관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앗제의 세계는 일요화가(다른 날엔 직장에 나가 일하고 일요일에만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와 상통

하는 소박한 분위기 속에 적막한 공간이 전개되어 있다. 더욱이, 그의 세계는 언제나 정경의 디테일에 감정이 쏠리

고, 그곳에는 초현실적인 무드가 감돌고 있다. 어쩌다가 촬영하는 그의 정물사진은 환상적인 오브제로서 우리를

유인해 낸다. 이와 같은 앗제의 일상적 세계의 피안에 있는 비 일상적인 세계의 시적인 전개가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이다.


참고 문헌

사진의 역사 -뷰먼트 뉴홀-
세계사진가론 -육명심-
사진예술론 - 해뜸출판사-


* 인터넷 자료*
*그의작품*

http://www.temple.edu/photo/photogra...get/index.html

http://www.geh.org/fm/atget/htmlsrc/index.html
추천 0

댓글목록

권경숙님의 댓글

권경숙

처음 이곳에 와서 "도웅회"라는 무슨 단체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 (머쓱)
오늘 드디어 이 코너를 다 읽었습니다,,,며칠 걸린 거 같습니다,, (뿌듯)
사진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각을 더 많이 배운 거 같습니다,,,
빠리친구가 "가장 빠리를 잘 표현한 사진가"라고 말해 주었던 앗제 밑에 댓글을 달게 되었네요,,,
열렬독자를 위해 천천히지만 계속 올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꾸벅

한가지 부탁을 덧붙이자면, 글의 가독성을 위해 행갈이를 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읽다 보면 자꾸 다음줄로 넘어가서,,(저만 그런가요?)
귀찮으시면 저한테 보내시구,,,제가 편집을 해서 다시 보내드릴까요??? -.-

열렬독자 배상

지충구님의 댓글

지충구

잘보다 갑니다. 좋은 자료들 갑사합니다.

신형남님의 댓글

신형남

아주좋은내용의 글 감사합니다.
언제부턴가 바쁜일상중에 익숙히 마주치는 것들중에서
미처보지 못하고 지나치는것이 있을까하고
일부러 관심을 가져보지만, 제낮은 시선과 제한된 활동범위 속에서는
좀처럼 찾기가 힘듭니다.
주말에 시간을 내서도 다녀보지만 창의적이진 못하고
남들만 따라다니는 결과가 되어서 심드렁해지곤 합니다.

오상철님의 댓글

오상철

개인적으로 안셀아담스보다 더 정이 가는 작가입니다.
오랜만에 앗제의 사진집 다시 꺼내 봐야겠습니다.

이충기님의 댓글

이충기

좋은 자료~~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꾸벅~

오창우님의 댓글

오창우

좋은 글 감사합니다.. 왠지 앗제를 알아야 사진을 좀 했다 소리를 들을 것 같다는...^^
아무튼 불우한 삶을 살았기에 연민의 정이 느껴집니다...

고독함,숫기없음 등 몇몇의 유사성을 발견하곤 개인적으로 더욱 애착이 갑니다..

앗제... 그 이름도 참 멋스럽습니다....

홍순익님의 댓글

홍순익

잘 봤습니다.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탁헌도님의 댓글

탁헌도

앗제와 초현실주의....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염승훈님의 댓글

염승훈

좋은 내용의 글....잘 보고 갑니다.

백경애님의 댓글

백경애

한권의 책을 읽은 기분이 듭니다.

이준원vw님의 댓글

이준원vw

좋은 내용 잘보고 갑니다~ ^^;;

유재홍/백만님의 댓글

유재홍/백만

내용이 좋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감사합니다.

박진우mavi님의 댓글

박진우mavi

최고의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임수준님의 댓글

임수준

앗제의 사진은 발터 벤야민의 책에 들어가있는 걸로 처음 봤는데
매우 담담한 사진에 슬쩍 보고 지나게 되면서도 돌아보니 신기하게 인상에 남아있더군요.
나중에 사진관련 책을 보면서 그 사진들이 으젠느 앗제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정확히 말하면 앗제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게되었던 거겠지만요)

그의 인생사는 이 글을 보면서 처음 알았네요. 왠지 정이 많이 갈것같은 작가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상일님의 댓글

한상일

너무 잘 읽었습니다

김유동님의 댓글

김유동

처음에 이 사진가를 제대로 알기전엔 "외젠 앗제"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외젠 앗제"라는 이름으로 "거리 사진"들을 보았으며,
"으젠느 앗제"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상인 연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H.C.B이 인정한 몇 안되는 사진가 중 하나이자, 한길을 묵묵히 걸을 줄 알았던 사람.
그의 사진인생은 가랑비에 옺이 흠뻑 젖듯 그렇게 감동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손창익님의 댓글

손창익

앗제가 힘든 인생을 산줄은 처음 알았네요

이름만으로도 상당히 부유층이란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그리고 그의 사진에서 멋스럽다는 이미지를
받아서 인지

삶이 고단했음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군요...그나마 좋아하는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행복했으리라

믿어 봅니다.

허영주님의 댓글

허영주

목숨을 연명하기에도
절실한 사진이
그렇게 감성적인 사진 이었구나.....

그 시절에
화가도 사진가도....
예술은 밥을 벌기 위한 수단이 많았고

천재성은 그 안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
우리를 지금도 놀라게 한다

유익한 글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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