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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진가 18. - 에리히 잘로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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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도웅회
  • 작성일 : 02-05-13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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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 235
▽ 이름:도웅회 (redelmar@hanmail.net)
▽ 분류:기타
▽ 2002/3/9(토) 16:09 (MSIE5.5,Windows98,Win9x4.90) 61.252.216.167 1152x864
▽ 조회:497

위대한 사진가 18. - 에리히 잘로몬 -


에리히 잘로몬(Erich Salomon 1886-1944)



보도사진의 선구자 에리히 잘로몬

소형카메라에 의한 '캔디드 사진' 길 처음 개척

에리히 잘로몬은 1886년에 태어나서 1944년에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태계 독일인이다.

그는 법학박사 학위를 가진 변호사이며, 어느 은행의 사업을 이어받을 사람으로 교육받았다. 그러나 당시 그가 개업했던 변호사 사무실의 운영이 어려워지자 1927년, 독일 울스타인 출판사의 광고일을 맡아하면서 중도에 사진가로서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일은 사진과 연관된 업무로서, 작업 초기에는 사진가들을 동원해서 일을 했으나., 나중에 전반적인 업무요령을 파악하게 되자 본인이 직접 일을 처리하게 되었다.

1928년, 울슈타인을 사직하고 프리랜서로 독립했을 때 그의 나이 42살 때였다. 비록 다른 사진가들에 비하면 출발이 늦은 편이지만, 높은 학식과 교양, 남다른 적극성과 민활한 기지로 보도 사진가로서의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는 독일에서 시작된 보도사진의 초창기에 소형 카메라에 의한 캔디드 사진의 길을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소형카메라의 기틀을 최대한 살려 활력이 넘치는 보도사진을 창출해 나갔다. 남들보다 먼저 갖고 다니기 편하고 밝은 렌즈가 딸린 소형카메라인 에르마녹스를 손에 넣었던 에리히 잘로몬, 그는 사회밑바닥 인생에도 관심을 두긴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욱 관심을 갖고 있는 정치 회의장이나 사교계를 자주 드나들면서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어수선했던 유럽의 정세에서 수시로 열렸던 국제회의장에 우격다짐으로 들어가거나 모험을 무릅쓰면서 촬영한 그는 1931년에 순간적으로 포착한 유명인사들이라는 사진집을 출판한다. 5개 국어에 능통한 어학실력을 발휘해서 국제적인 거물급 정치인들과 접촉하면서 찍어나간 사진을 통해 그의 캔디드 수법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때문에 잘로몬은 오늘날, 당시의 미흡한 사진기술에도 불구하고 관찰자로서의 위력과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재능을 발휘했던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거물급 정치인 무의식적 모습 촬영

시간성 앞세운 대상의 객관성 파악

그의 사진은 1920년대에 독일에서 일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 의식의 자각, 즉 모든 대상을 과학적 입장에서 재조명하려는 새로운 객관성의 도입과 밀접한 보도사진은 셔터스피드를 살려 시간성을 강조하여 대상의 생생하게 살아있는 객관성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때까지 보도사진은 저널리즘과 연관되어 단순히 신문이나 잡지기사를 뒷받침하는 구실만 하였으나, 20년대 독일에서는 단순한 뉴스사진이 아닌 대상에 대한 주제의 분석, 해석 및 사진작가의 뚜렷한 관점에 의한 독자적 보도사진이 모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자각은사진도 문자와 마찬가지로 사진가의 생각, 사상 같은 내면세계를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생긴 것이다. 이렇게 보도사진이 새롭게 도약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잘로몬은 대상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가 됨으로써 대상 자체가 화면 속에서 스스로 남김없이 드러낼 수 있게 하였다. 다른 사진가들이 거물급 인사들의 겉으로 드러난 공적 생활에만 매달리고 있을 때, 잘로몬은 그들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인식아래 그들의 일상생활, 내면적인 인간성을 파헤쳤다. 이것은 바로 사진의 시각 정보전달이라는 기능에서 보도사진이 한 걸음 더 진전할 수 있었던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베를린, 미국 등 외국에서 국제적으로 전시되었고, 그의 사진들을 다시 모아 출판한 '에포크의 초상'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후, 잘로몬은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신변의 위험을 피해 네덜란드로 망명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의 네덜란드에 진군하자 아내와 감께 유태인 집단수용소에서 처형되는 비극을 맞았다. (인터넷자료)



* 그의 작품 *

http://fototapeta.art.pl/fti-salom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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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혁진님의 댓글

이혁진

볼 수 있는 작품 수가 적은 게 아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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