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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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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박유영
  • 작성일 : 11-06-09 01:08

본문

2006년 여름부터 돌아 다녔으니, 장터와 시골마을을 헤메고 다닌 지 어언 5년이 되어 가는 듯 합니다. 일요일 미명이면 어김없이 집을 빠져 나와 밀양, 청도, 함안, 의령, 창녕, 고성 등 부산 인근 시골마을들을 여기 저기 누비고 다녔습니다. 눈에 익은 정든 산하, 내 조상들의 혼백이 묻혀 있는 땅, 나 역시 살고 있는, 그리고 내 아이들이 살아야 할 이 땅에서 질곡의 한 세월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바짝 다가가서 찍고 싶었습니다. 그 분들 얼굴의 주름살을, 곱아든 손가락을 카메라 렌즈로 쓰다듬고, 만져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분들의 얘기를 카메라로 듣고, 살아 오신 삶의 궤적을 사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욕심은 갈수록 과해져서^^ 점점 사진에서 구도도, 배경도 사라지고 인물의 얼굴이나 손등 또는 발등처럼 실체의 일부에만 집중하는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더 다가서서 마크로렌즈로 그 분들의 눈매나 입매... 콧잔등과 목선을 찍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거기까진 저도 무리인가 봅니다.^^)
거시적인, 그래서 주목받는 거창한 역사가 아닌, 누군가가 남기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 땅에서 살고 가신,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삶이 사진으로 모여 언젠가는 소담한 냇물 같은 역사가 되기를 꿈꾸면서 미련하다는 얘기를 들을 만치 열심으로 돌아 다녔습니다.^^
그 분들의 흔적을 찍고 싶었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마르고 닳도록 밟고 다니셨을 낡은 나무 문턱이며 손때가 묻고 녹이 슬어 버린 문고리들, 그 분들의 아침을 깨워 주웠을 찌그러진 알루미늄 세수 대야며 마음조차 허전한 밤, 그분들의 야뇨를 받아주었을 스텐 요강 단지들, 헛헛한 마음으로 내다보았을 문창살이며 우물가, 깨진 두레박이나 이지러진 절굿공이들이 그렇게 정겹고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밀양을 찾았습니다. 늘 마음속에 흠모의 기억으로 담고 있던 밀양시 산외면 기회마을 밀양박씨 천석군집 김 명희 할머님, 당당한 대갓집의 풍모도 그러려니와 한 집안의 위엄과 역사를, 존재 자체로 보여 주시던 할머니를 그 동안 말은 못해도 존경해 왔나 봅니다. 6월 4일 새벽, 대문을 열고 사랑채로 들어서는데 사랑채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내다보는 젊은 여인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얘기, 할머니가 얼마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습니다. 한 동안 사랑채 마당을 멍하니 보다가 사진도 몇 장 못 찍고 돌아 나왔습니다. 김 명희 할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생전의 모습과 그날 찍은 문짝 사진을 올립니다.


1. 2008년 5월 3일 M3 50rigid TX D-76
2. 2011년 6월 4일 M3 50 1.0 TX rodinal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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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송안호님의 댓글

송안호

돌아가신 할머니의 명복을 빌어 드립니다.

서재근님의 댓글

서재근

근엄 하면서도 포근한 마음이 느껴지는
그분의 자태를 더는 볼 수 없군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승현님의 댓글

김승현

할머니명복을빌면서 박유영님 멋진일한다구요.......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지나는 세월을 붙잡듯 친근하고 따듯한 모습들 보면서, 그져 보기만 했는데
박선생님의 고충과 아픈 마음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런 마음이 담겨 있어서 더욱 깊고 이야기가 풍부한 사진들이었나 봅니다.
사진과 글 감사합니다.

황성태님의 댓글

황성태

늘 블로그를 통해 좋은 사진들 잘 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대석님의 댓글

김대석

유영후배의 절절한 사진작업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런 글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 옵니다.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승천하신 분의 사연이
애달프게만 느껴집니다.

조현갑님의 댓글

조현갑

먼저 김명희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사연이있고 목적이있는 작품생활이 더욱 발전하시기 바람니다!

냇물이 강이되고 강물은 바다로흘러 대양을 이루는게 자연의 순리고 만고의 진리가 아닐까요!!!

유영님의 성실과 노력이 대양이되어 세계사진계에 영향을주는 그날까지 화~~~이팅!!!!!!!!!!!!!!!!

강정태님의 댓글

강정태

어찌하여 나도 이렇게 맘속 한켠이 허전해 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장재민님의 댓글

장재민

밀양이라면 사시는 분들이 사고 없이 천명을 다할 수 있는 동네라는 느낌이 드는데
안타깝습니다. 저의 모계가 밀양 박씨라서 더더욱..

박유영님 꾸준한 작업, 땀 한방울 안흘리고 편히 앉아 고국의 향수를 달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우동균님의 댓글

우동균

기분이 어떠셨을지... 글에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오늘의 글을 통해, 누군가의 세월,흔적을 기록하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바라시는 바를 이루어가시면 좋겠습니다.

사우/유성태님의 댓글

사우/유성태

박유영 선배님의 사진 세계에 이런 깊고도 귀한 속뜻이 있었는줄 무지한 저는 알지 못했었습니다.

소중한 기록이고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사진은 어떤 자세로 찍어야 하는 건지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넋두리'다운 넋두리 장면을 본 것 같은 느낌입니다.

박삼정님의 댓글

박삼정

제가 밀양 박가여서, 밀양시 산외면을 찾아 가려다 벼르기만 하고는,
아직도 못 가고 있었습니다. 박 선배님의 글을 읽고 조만간 찾아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치환님의 댓글

이치환

사진으로 진중한 삶을 만들어가시는 유영님의 작업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흔하디 흔한 존재, 그 삶일지라도 유영님처럼 진지하게 다가서는 앵글 속에 남겨지므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삶과 죽음 그리고 더 깊은 사유에 대한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기에, 이런 작업이 진정 훌륭한 사진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진 메카니즘 놀이 혹은 유치한 자기 만족에 빠진 가치없는 사진과 글이 난무하는 요즘
유영님의 인물 사진 한 장 한 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생각됩니다.

이 작업 끊어지지 않도록 멀리서나마 마음으로 성원을 보냅니다.
유영님 화이팅!!!!

신한주님의 댓글

신한주

언제나 유영님의 사진을 대할 때면 ...
끈끈한 인간의 정을 느끼면서 감상해 왔었습니다.

이렇게 작가의 마음을 조금 더 알수 있는 글을 읽고 나니,
그 마음이 더욱 진하게 다가옵니다.

앞으도로 사람냄새 나는 작품들
더욱 기대합니다.
감사드립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annie/정은주님의 댓글

annie/정은주

인용:
원 작성회원 : 박유영
2006년 여름부터 돌아 다녔으니, 장터와 시골마을을 헤메고 다닌 지 어언 5년이 되어 가는 듯 합니다. 일요일 미명이면 어김없이 집을 빠져 나와 밀양, 청도, 함안, 의령, 창녕, 고성 등 부산 인근 시골마을들을 여기 저기 누비고 다녔습니다. 눈에 익은 정든 산하, 내 조상들의 혼백이 묻혀 있는 땅, 나 역시 살고 있는, 그리고 내 아이들이 살아야 할 이 땅에서 질곡의 한 세월을 살아오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바짝 다가가서 찍고 싶었습니다. 그 분들 얼굴의 주름살을, 곱아든 손가락을 카메라 렌즈로 쓰다듬고, 만져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분들의 얘기를 카메라로 듣고, 살아 오신 삶의 궤적을 사진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욕심은 갈수록 과해져서^^ 점점 사진에서 구도도, 배경도 사라지고 인물의 얼굴이나 손등 또는 발등처럼 실체의 일부에만 집중하는 사진을 찍게 되었습니다.(더 다가서서 마크로렌즈로 그 분들의 눈매나 입매... 콧잔등과 목선을 찍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거기까진 저도 무리인가 봅니다.^^)
거시적인, 그래서 주목받는 거창한 역사가 아닌, 누군가가 남기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이 땅에서 살고 가신, 한 분 한 분의 소중한 삶이 사진으로 모여 언젠가는 소담한 냇물 같은 역사가 되기를 꿈꾸면서 미련하다는 얘기를 들을 만치 열심으로 돌아 다녔습니다.^^
그 분들의 흔적을 찍고 싶었습니다.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마르고 닳도록 밟고 다니셨을 낡은 나무 문턱이며 손때가 묻고 녹이 슬어 버린 문고리들, 그 분들의 아침을 깨워 주웠을 찌그러진 알루미늄 세수 대야며 마음조차 허전한 밤, 그분들의 야뇨를 받아주었을 스텐 요강 단지들, 헛헛한 마음으로 내다보았을 문창살이며 우물가, 깨진 두레박이나 이지러진 절굿공이들이 그렇게 정겹고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밀양을 찾았습니다. 늘 마음속에 흠모의 기억으로 담고 있던 밀양시 산외면 기회마을 밀양박씨 천석군집 김 명희 할머님, 당당한 대갓집의 풍모도 그러려니와 한 집안의 위엄과 역사를, 존재 자체로 보여 주시던 할머니를 그 동안 말은 못해도 존경해 왔나 봅니다. 6월 4일 새벽, 대문을 열고 사랑채로 들어서는데 사랑채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엉거주춤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내다보는 젊은 여인에게서 들은 충격적인 얘기, 할머니가 얼마 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비보였습니다. 한 동안 사랑채 마당을 멍하니 보다가 사진도 몇 장 못 찍고 돌아 나왔습니다. 김 명희 할머니의 명복을 빌면서 생전의 모습과 그날 찍은 문짝 사진을 올립니다.


1. 2008년 5월 3일 M3 50rigid TX D-76
2. 2011년 6월 4일 M3 50 1.0 TX rodinal 1:100








예전 출사 때 멍하게 있던 제 모습 뒤로 보이시던 할머니군요.

늦었지만 명복을 빕니다..

고현구님의 댓글

고현구

아 ... 갑자기 할머님이 뵙고싶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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