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 8~10 (한국 녹차의 현실) (茶에의 歸依 ①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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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조성욱
- 작성일 : 09-05-02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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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 녹차의 주역인 김복순씨 생전 모습(1986년 ). 자신이 만든 차를 달여내고 있는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한국의 녹차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대량 생산 기계 설비를 갖춘 공장에서 만드는 일본식 증차가 있고,
제조 전과정을 손으로 처리하는 이른바 전통 수제차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통차’ 라는 수식어는 모든 녹차 종류마다 붙여지고 있어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요.
손으로 만드는 녹차는 다시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의 제다법을 원류로 삼는 사찰녹차와
김복순에게서 시작된 덖음녹차입니다.
초의선사의 제다법은 세 갈래로 사자전승(師子傳承=절집에서 스승과 제자 스님으로
이어져 내리는 법)되었습니다.
첫째, 대흥사 차법은 초의-범해-각안-선기-여호-응송스님으로 이어졌고,
둘째, 송광사 차법은 범해-각안-다송자-구산스님으로 이어졌습니다.
셋째, 선운사 차법은 초의-수홍-도범스님으로 차법의 맥이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 정화 이후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립과 종파의 난립으로
명확하게 제다법이 전수되고 있지 않습니다.
초의선사의 제다법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재현해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한가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다송’에서 이르기를, ‘칠불사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은 항상 차잎을 늦게 따서
땔감을 말리듯해서 시래깃국 끓이듯 푹푹 삶으니 차 색깔은 탁하고 붉으며 맛은 쓰고
떫어서 천하의 좋은 차를 속된 솜씨가 다 버려 놓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기록의 내용과 같은 차 제조법은 화개지방에서 수백년 전부터 민간에 전해지는
‘잭살’이라는 차를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반발효 또는 발효차라고 일컬어지는
원류이자 중국의 보이차와도 유사한 종류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초의선사의 제다법은 이와 다른 것으로서 차의 색이 맑고 향이 은은하며
맛이 달고 가벼운 청차(靑茶) 계열인 듯싶습니다.
맑은 색이란 연한 청록이거나 황색을 띤 것으로서 반발효와 덖음이 적절하게 조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명확한 기록이나 제다법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서 안타깝습니다.
해남 대흥사 응송스님의 제다법은 차잎을 따서 숨죽이는 법 흔히 살청(殺靑)이라고도
함인데, 차잎을 솥에 넣고 불을 땔 때 물을 적당히 뿌린 뒤 솥뚜껑을 덮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꺼내어 비비는 것입니다.
곤양 다솔사 효당스님의 제다법은, 펄펄 끓는 물에 차잎을 살짝 데쳐내어 덖고,
비비고, 따뜻한 방안에서 적당하게 띄워서 만듭니다.
해남지방에서 시도되었던 중국차법을 응용한 김두만(金斗萬)의 경우는 시루에다
차잎을 넣고 증기로 쪄낸 다음 비벼 말리는 것이었지요.
응송스님과 효당스님의 제다법은 온돌방에서 띄워 말리는 점이 닮았습니다.
또한 두 어른 모두 일본 유학파였고 처음엔 조계종 승려였다가 나중엔 갈등을
빚은 것도 닮았는데, 두 어른의 차법은 각각 영남과 호남 차법의 큰 산맥을
이루었음도 공통점입니다.
김복순의 수제차법은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저마다 어깨너머로 훔쳐보았거나
훔쳐보고 만드는 이를 다시 훔쳐보고 흉내 내면서 복잡하고 억지스러운 저마다의
독창성이 더해지거나 빠졌습니다. 김복순 차법에서 분파된 녹차와 사찰녹차법의 아류가
뒤섞여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 우리나라 전통수제 녹차의 현실입니다.
茶에의 歸依 ①
김복순 내외가 받았던 식품제조허가 (정확하게는 조태연 명의로 되어 있었음)는
우리나라 녹차 제조역사상 최초의 것이었습니다.
홍차 등 다른 식품 분야에는 이미 허가제도 시행 이후 수많은 허가증 발급이 있어왔지만
녹차만은 정확한 제조법을 몰랐기 때문에 허가를 신청하는 사람이 없기도 했겠지요.
김복순 내외는 녹차 제조 허가를 받는데 필수적인 근거 자료이자 녹차가 어떤 식품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녹차의 성분분석표인 ‘시험성적서’까지 발급 받았지요.
1962년 9월 18일 ‘경상남도 위생시험소’에서 분석하여 발행한 자료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총 9개 항목에 걸쳐 시행된 시험에서 △관능시험 즉 냄새와 맛은 ‘보통’이며
△성상은 특수 향이 있는 녹갈색의 마른 잎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 △불순물은 검출되지 않았으며 △유해성 중금속도 검출되지 않았고
△인공 착색 물감도 나오지 않은 것으로 돼 있습니다. 이어 △수분은 5.5%
△단백질 25.7% △조지방 2.3% △회분 6.2%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엄격한 법 절차를 거쳐 발급된 식품제조허가증을 가지고 녹차를 만드는
김복순 내외가 몹시 불편한 존재로 떠오른 것은 홍차산업이 재미를 못보게 되면서부터
였습니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녹차를 만들 줄 모르기 때문에 기술적인 문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요. 기술을 모두 가르쳐주거나 이전해달라는 직접 간접 요구가
거절당하고, 녹차가 장차 돈이 되리라는 전망이 분명한 상황에서 김복순 내외는
걸림돌이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무엇보다 얼렁뚱땅 대량으로 만들어 큰 돈을 쥐겠다고
설치는 자들에게 이 부부의 존재는 몹시 거북했겠지요.
그리하여 이들의 식품제조허가를 취소시켜버리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세워지고,
앞에서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을 하는 사람으로는 하급직 공무원 한 사람이
지목되었지요. 상당한 자본과 무시할 수 없는 권력으로 무장한 세력의 사주를 받은
하급직원은 이를 거절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자는 먼저 허가증을 반납해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허가증의 규격이 바뀌었기 때문에 새로운 규격으로 된 허가증으로 바꾸기 위해서라고
했지요. 하도 공력을 들여 발급받은 허가증이기도 했거니와 10년 넘도록 가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허가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서
계속 시일을 끌었지요. 담당자는 집요하게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하도 귀찮게 굴어서
김씨 부부는 결국 시키는대로 했지요.
그런 뒤 그 담당자는 이런저런 변명을 대면서 새로운 규격으로 된 허가증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런지 몇달 뒤 허가증을 재발급 받으라는 공문이 왔지요.
그제야 놀라서 관청으로 갔더니 이미 재발급 신청기간이 한달이나 지났기 때문에
이들 부부의 허가는 자동으로 취소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담당자가 일부러 재발급 신청 공문을 붙잡아두었던 것이었지요.
다른 여러 사람들은 신규로 허가를 받았지만 이들 부부만 무허가가 된 것이지요.
군청, 도청, 보건사회부로 찾아가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담당자도 병으로 죽어버렸습니다.
茶에의 歸依 ②
허가가 취소된 뒤부터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무허가 식품인줄 알면서도 이들이 만든 차만 찾는 사람이 계속 늘어난 것이지요.
이들의 차를 즐겨 마시고, 존경이나 정중한 인사를 치러야 하는 자리에 선물로
내놓기 위해서 이들의 차를 적잖이 사가는 이들 중에 공직자가 많이 있었다는 것은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허가 식품을 단속하고 처벌해야 할 자리에 있는
공무원들일수록 이 부부가 만든 차만 사갔으니까요.
그같은 분위기를 잘 반영해주는 말이 생겨났지요.
낮에는 무허가 식품을 단속하러 나왔다가 밤이면 낮에 단속했던 그 무허가 제품 차를
사가는 단골 고객이 된다는 말이 그것이었지요.
김복순 내외가 만든 이른바 무허가 식품에 대한 경찰, 보건소 직원, 군청 직원들의 이중적
태도는 당시의 녹차 제조를 둘러싸고 암암리에 벌어졌던 제도적 모순관계를 엿보게
해줍니다. 군사정권은 총과 강압으로 국정 전반을 무섭게 밀어붙이는 이면에
아부와 뇌물로 이권을 농단하고, 교활한 인맥의 연줄과 지연 학연으로 얽힌 권력관계의
부패로 치달았지요.
먼 일가붙이 한점도 없는 철저한 객지에서 어린 자식 여섯을 데리고 다시 무허가 식품의
제조와 판매 혐의를 받으며 살아가는 나날은 참기 어려운 수모와 고통으로 얼룩졌지요.
부산을 떠나올 때 한 삼사년만 고생하면 보람도 누리고 생활도 안정되리라 여겼던 것이
십년이 지났어도 그 아득한 좌절의 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식들에게 학교 교육 제대로 시키기 어려웠고, 추운 겨울 닳아서 구멍난 신발 바닥으로
눈녹은 물이 스며올라도 새 신발을 사 신길 수 없도록 생활은 어려웠습니다.
양식이 없어서 두부 만들고 난 뒤에 남는 콩비지로 아이들의 허기를 달래주면서
김복순이 흘린 눈물은 피였습니다.
허가증을 가져간 사람, 그 자를 내세워서 허가를 취소시킨 이들에 대한 원망이
어찌 없었겠습니까만, 그래도 드러내 놓고 원망할 수 없는 외로운 객지였습니다.
죄가 있다면 녹차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여 이름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었겠지요.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탄압은 끈질기게 계속되었지요.
단속하러 나온 공무원들도 보다 못해 김복순 내외에게 귀띔해주기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당하고만 있느냐, 차라리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만들면 안되느냐,
우리들도 괴롭다, 미안하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자리를 뜨기도 했지요.
이들 내외는 이를 악물었습니다.
차(茶)는 원래 은혜의 산물인데, 직접 간접으로 녹차 만드는 기술을 배워서
그만큼 돈 잘벌고 유명인사도 된 것이 누구 덕인 줄 아느냐,
은인을 이다지도 배반하고 짓밟아서야 되겠느냐는
속울음을 울면서 몇번이고 다짐을 했습니다.
하늘 두쪽나도 녹차 만드는 일로 승부를 낼 것이며, 차 만드는 일을 하다가 일 속에서
굶어죽을 수 있다면 그 길이 가장 깨끗하고 떳떳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지요.
자식들한테는 참으로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자식들도 머잖아서 부모가 걸어간 길이 정녕 부끄러움의 죄가 아니라는 걸 알게되리라
확신했습니다. 김복순 내외가 겪은 수난과 식구들의 고통은 곧 그들의 생존이
茶에의 귀의(歸依)였음을 알게 해줍니다.
박창희 기자 [2002-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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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경복님의 댓글

부모님께서 고난의 가시밭 길을 걸어가셨음에 가슴이 아립니다.
조선생님의 어린 시절에, 숱한 고생이 점철되었음에도 제다의 길을 걸어가시니, 실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이효성님의 댓글

한 편의 인생 다큐멘터리를 감사하는 듯 합니다. 그 긴 고낭의 과정을 묵묵히 힘써 헤쳐
나오신 부모님들의 고난의 여정에 승고함마저 듭니다. 계속 이어질 이야기가 계속 궁금
하여 집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하효명님의 댓글

한국 茶의 발전에도 예외 없이 검은 손이 등장을 해서
조성욱님 부모님과 형제분들이 人災로 엄청난 고생을 하셨군요.
그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 온 저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내용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재근님의 댓글

처음부터 여기까지 단숨에 읽어 내려 옵니다.
한편의 생생한 다큐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어떤 분야건 최고가 된다는것은,
남모르는 고난과 눈물 그리고 상상할수 없는 노력에 의해서만,
이루어 질수 있다라는것을 다시한번 보여 주십니다.
전혀 모르던 분야에,
선생님의 글을 통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부모님을 갖으신 선생님이 부럽 습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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