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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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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6-21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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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쓸기

"부탁이 있어요."
"뭔데?"
"방 좀 쓸어 주시면 안돼요?"
"되지."

그러고 보니 나는 어지간히 게으른 사람이다. 일상에서 특히 그렇다. 세상의 변화는 눈으로 열심히 좆으면서도, 내 주변의 먼지와 쓰레기들을 방치하다니, 모순 덩어리다. 방 쓸기는 명절에 맞추어 한두 번쯤 하나? 나는 나의 나태를 참회한다.

빗자루를 들고 찬찬히 한 번 스윙에 30*40Cm의 공간을 말끔하게 청소해 나간다. 금방 끝나는 일은 아니지만, 한 번의 빗자루 질에 꼭 정량적인 성과를 느끼게 하는 확실한 노동이다. 빗자루 질을 하면 곧 손목이 아파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곤 또 깨닫는다. "아, 내가 너무 힘을 주어 빗자루 질을 하고 있구나."

빗자루 질은 결코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렛대의 원리에 의해, 손목에 무리한 힘이 가해지면 육체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하지 않았음에도 곧장 엘보가 오는 것이다. 세상사의 다른 일에도 그렇듯 요령이 필요하다. 힘을 주지 않고 슬슬 부드럽게 쓸어가다, 스윙의 가장 중심점이 되는 지점에서, 빗자루 자체의 탄성을 이용한 스냅에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완강하게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과 각종 먼지들이 힘없이 무너지게 된다.

이것은 군대에서 눈을 쓸어 본 사람이라면 안다. 훈련병들은 채 10m도 쓸지 못하고 어깨와 손목, 특히 허리의 통증을 호소한다. 하지만 노는 것처럼 보이는 고참병들은 때로 폭 2m의 도로를 1Km씩이나 쓸어 내고도 멀쩡하다. 그것도 각종 수다와, 참견과, 낄낄거리며 눈밭에 오줌으로 노랗게 이름을 새기는 행위예술까지 하면서... (가끔 지나치게 잘난 척 하는 여자라고 생각되면 나는 묻는다. "이름이나 쓸 줄 알어? 눈 위에 오줌으로." 그러면 상대는 대개 어이없다는 듯 웃고만다. 하지만 어쩌다 터프한 척 하는 여자도 있다. "쓸줄 알아욧!" 그러면 나는 회심의 일격을 가한다. "니가 재봉틀이냐?")

문득 고층 아파트에 살 때의 씁쓸한 경험이 떠올랐다. 적지 않은 평수의 (코딱지만한 아파트라도 청소할 때는 늘 그 넓이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된다. 32평이면 운동장이다.) 아파트를 쓸어 가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양쪽 창문을 열면 거센 바람으로 저절로 청소가 될 것 아닌가? 나는 나의 영민함을 혼자 뿌듯해 하면서 득의만면한 얼굴로 베란다 쪽의 넓은 창을 모두 열었다. 그리고 현관문과 부엌의 창을 열었던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거센 바람은 분명히 불어 들어왔지만, 베르누이의 정리에 따라 속도를 높이며 각종 먼지를 싣고 다른 쪽으로 빠져나간 것이 아니라, 대 혼란의 소용돌이를 만들고 말았다. 거실 테이블 위의 꽃병이 넘어진 것을 시작으로 각종 잡지, 먼지, 휴지, 메모. 3M 딱지. 바람에 날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평면에서 솟아올랐다.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던 강아지는,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져 거실을 굴러다니던 두루말이 휴지를 맹렬하게 물어뜯었다.

문득 정신을 차린 내가 다시 한쪽 창문을 닫기까지의 약 10초간, 나는 나머지 휴일 전부를 이 사건의 수습에 처박아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이것은 내 인생의 세 번째 실패였다.

첫 번째 실패는 ‘폭우가 오는 날 세차를 하면 어떨까?’ 하는 깔끔한 아이디어였다. 나는 즉시 대야에 비눗물을 잔뜩 풀고, 골목길에 주차해 두었던 차에 달려들어 억수 같은 소나기를 맞으며 비누칠을 했다. 나는 언제나 내 아이디어를 실험하기에 주저 하지 않는다.

비는 이러 저리 원하는 데로 방향을 바꿔주지 않는다. 자동차는 한쪽 면에 고스란히 비눗물 투성이가 되어 불만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소나기는 이내 멈추었다. 나는 주위를 지나던 이웃들의 걱정스런 눈빛을 기억한다. 그들은 뭔가 정상 아닌 이웃이 걱정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다시 정성들여 세차를 해야만 했고, 세차를 마치자 다시 소나기가 왔다. 게다가 입고 있던 옷까지 빨아야 했다. 빨래가 잘 마르지도 않던 장마철에.

내 두 번째 실패는 모 업체의 소나무향을 이용한 음료 때문이었다. 한참 골프에 빠져있던 친구들과 새벽 티업에 나섰을 때, 내가 제안했다. "그거 뭐 별거겠어? 이렇게 깨끗한 송진 조금하고 사이다만 있으면 될 거야." 나는 자신만만하게 (나는 바보짓을 할 때마다 늘 자신 만만하다.) 송진 덩어리를 입에 넣었고, 차가운 사이다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게다가 다른 친구들도 성급하게 나를 따라했다. (바보짓은 모두들 즉각 따라한다.)

나는 송진이 즉각 이빨 사이에 단단하게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 완강한 송진을 좀처럼 제거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날은 하루 종일 침묵의 라운드였다. 말을 하려고 할 때만다 송진이 바보들의 이빨을 서로 접착시켰기 때문이다. 중간에 들른 그늘 집에서는, 모두 화장실로 몰려가 손가락으로 이빨을 문지르며 북새통을 치렀지만 송진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라운딩이 끝나고 머리에 샴푸를 잔뜩 묻힌 채 샤워기 밑에 서있을 때, 뒤통수를 때린 놈이 누군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분명히 나머지 3놈 중의 하나 일텐데...

나는 조금씩 방을 쓸어가다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많이 빠져있음을 느낀다. 젊을 때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 나이가 들면서 더 많이 빠지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다 대머리가 되나? 슬그머니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본다. 방바닥에 작은 반점이 있다. 혈흔이다. 이게 뭐지? 이윽고 나는 슈나우저 종의 개, 건빵이의 생리 혈임을 깨닫는다. 흠. 이번에 강아지를 좀 낳게 할까? 앗! 동전이네. 게다가 500원짜리. 나는 이런저런 생활의 발견으로 내 노동의 피곤을 까마득히 잊는다. 단순하다. 나는 단순한 남자로 태어난 내게 만족한다. 빗자루 질은 의외로 세밀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갑자기 나는 빗자루를 놓고 박수를 친다. 초파리다. 가여운 초파리는 투박한 내 손바닥에 얇은 포가 되어 붙어 버린다. 나는 추리한다. 초파리가 나타났다는 것은 반드시 어딘가에 이들에게 영양과 휴식처를 공급하는 오염원이 있다는 의미다. 매서운 눈빛으로 쓰레기통을 연다. 말끔하다. 나는 다시 나의 후각과 청각, 시각을 총 동원해서 임팔라 영양을 좆는 레오파드처럼 거실 바닥을 샅샅이 뒤진다. 호오, 원인은 피아노 위에 놓여있던 오래된 케이크다.

나는 즉시 쉰 냄새를 풍기는 치즈 케이크를 비닐봉지에 넣어 격리 수용하고 케이크 상자를 세제로 씻는다. 이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소변이 마렵다. 두 다리를 꼬면서 간신히 케이크 상자를 닦고, 평평하게 재활용할 수 있도록 접고 곧장 화장실로 달려간다. 이럴 때 나는 스스로 반사 신경계의 동물임을 절감한다. 파블로프의 개랑 다를 것은 또 뭐람?

어느 덧 현관 앞이다. 나는 늘 가장 밝은 곳, 넓은 곳에서 출발하여 좁은 곳으로 방 쓸기를 진행한다. 각 방은 따로 따로 이런 방식을 적용한다. 바람의 방향을 보고, 먼지의 상태를 살피며, 머리카락 하나도 빠져나갈 틈이 없이 포위망을 좁혀 점점 좁은 곳으로 나의 희생자들, 즉 먼지들을 쓸어 모으는 것이다. 나는 선사시대 이제 부터 포식자 수컷들의 D.N.A.에 주어진 본능을, 오늘 좁은 내 집에서 충분히 진지하게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쓰레받기에 수북이 담긴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변기에 조심스레 쏟아 붇는다. 이제 이 먼지 덩이들은 변기물 위에 표면장력으로 포박된 채, 꼼짝도 못하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 나는 선고 대신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마침내 물을 내린다. 나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먼지들의 외마디비명을 들으며 포만감을 느낀다.

흠... 휴일은 아직도 까마득히 남았다. 이제 커피나 한 잔 할까?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www.allbaro.com


[사진 : 청소하기 좋은 시간]
LEICA V-LUX1
Manual Mode 16:9 Ratio (3584 *2016)
추천 0

댓글목록

오장원님의 댓글

오장원

일상적이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사는게 다 거기서 거기... 우리가 일상에 잊고 있던 소소한 즐거움을 한 번 떠올려 보았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즐거우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일입니다. ^~^

정한구님의 댓글

정한구

'그리고 마침내 쓰레받기에 수북이 담긴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변기에 조심스레 쏟아 붇는다. 이제 이 먼지 덩이들은 변기물 위에 표면장력으로 포박된 채, 꼼짝도 못하고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 나는 선고 대신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 마침내 물을 내린다'

요거.....

그러다가 변기가 막혀 버린다면
4번째 실수가 되시는 겁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앗 말씀을 듣고 보니 등줄기에 식은 땀이... ^~^

이용훈님의 댓글

이용훈

나는 언제 김명기님과 같은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글을 올려나 했는데 정한구님의 마무리 글에 박장대소하고 있습니다. 제 뒤에서 잠을 자던 아내가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내가 방구 꿔서 웃는거야?"하네요.
일상의 내용을 잘 표현해 주시고 잘 읽었습니다.
좋은밤 되십시요.

서재근님의 댓글

서재근

많이 웃어 보았습니다.
기발한 발상과 추진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글쓴이의 소박하고 순수함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좋았 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이용훈베드로
나는 언제 김명기님과 같은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글을 올려나 했는데 정한구님의 마무리 글에 박장대소하고 있습니다. 제 뒤에서 잠을 자던 아내가 잠꼬대 같은 목소리로 "내가 방구 꿔서 웃는거야?"하네요.
일상의 내용을 잘 표현해 주시고 잘 읽었습니다.
좋은밤 되십시요.


저도 이용훈베드로님의 댓글을 읽다가 박장대소 합니다.
부인의 한마디가 진짜 걸작이십니다.

정말 소소한 즐거움 들은 일상 속에 흩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서재근
많이 웃어 보았습니다.
기발한 발상과 추진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글쓴이의 소박하고 순수함을 엿볼 수 있어 더욱 좋았 습니다.


아, 서재근 선배님.
이번 멋진 여행 잘 다녀 오시기 바랍니다.
다녀 오신 뒤에 여행기와 사진과 소주....
기대합니다. ^~^

신 인수님의 댓글

신 인수

요즘은 빗자루 보다 청소기를 사용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세탁기로 세탁을 하면 잘 안된다고 손빨래를 하시죠.
요즘 청소기 성능 아주 좋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신 인수
요즘은 빗자루 보다 청소기를 사용합니다.
저희 어머니는 세탁기로 세탁을 하면 잘 안된다고 손빨래를 하시죠.
요즘 청소기 성능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청소기는 시끄럽다고 절대 못쓰게 합니다.
조용한 휴일 오전... 음악을 잔잔하게 틀어 놓고
빗자루질 하는 재미도 쏠쏠 합니다...

에이... 실은 청소기 없어요... ㅜ.ㅜ

조해룡님의 댓글

조해룡

눈위에 이름 적기에 뒤집어 졌습니다.
여자는 이름 적을수 없을까요.????
여자 한테 물어 보면 어찌 될지 궁금해지네요.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남자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것이나 다름 없겠지요.
서로의 성 역할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남자가 있어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어 남자가 있지요...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신의 의지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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